'70代에 다시 새긴 명함'‥경무관등 출신 어르신들 궁능관람 안내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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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평 남짓한 공간. 뭔가 써내려가는 소리와 강의에 집중하는 뜨거운 눈길. 책장 넘기는 소리.간간이 들리는 깊은 호흡….
도서관이나 입시공부하는 모습이 아니다.
칠순이 넘은 궁능관람 안내 지도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조경'이론수업 첫날인 지난 20일 고궁박물관의 한 회의실 풍경이다.
궁능관람안내 지도위원은 문화재청이 고령자들을 위한 일자리도 만들고 문화재 관람객들도 안내하는 일석이조를 겨냥,칠순이상 하루 1만보 보행이 가능한 건강한 '실버'를 대상으로 뽑았다.
합격자의 면면을 보면 79세의 전직 단과대학장,77세의 사진기자,73세의 방송사 상무,기업체 사장 출신 등 화려한 왕년을 자랑하는 역전의 노장들이다.
104명이 응모해 서류전형, 외국어 능력 등을 포함한 면접시험, 신체검사를 거쳐 최종 10명이 선발됐다.
이번 주 이론 소양교육을 받은 이들은 내주초 근무지에 배속될 예정이다.
"고희 넘어 얻은 새 명함 뿌듯합니다.
합격소식에 가족들이 더 기뻐했죠. 해뜨면 나갈 곳이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습니다." 은퇴할 때까지 줄곧 교단에서 역사를 가르친 김유해씨(72·선정릉 근무예정)는 체력은 전혀 문제없다며 교단의 경험을 살려 관람객 수준에 맞는 맞춤 안내멘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37년간 경찰로 근무하다 89년 경무관으로 정년퇴임한 권성기씨(72·서오릉 〃)는 "황혼에 얻은 새 직장, 게다가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일을 하게 돼 의욕이 넘친다" 고 기뻐했다.
70세에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해 화제에 오르기도 한 고태잠씨(75·중령 예편)는 이력서와 관련서류 일체를 한자로 기록해 채용담당자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오는 11월이면 결혼 50주년이 되는데 뜻깊은 일자리를 갖게돼 가문의 영광"이라고 즐거워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들이 이론수업을 받기전 미팅을 갖고 궁능 안의 하찮은 돌 하나라도 생명을 불어넣는 설명을 해달라는 주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왕년, 그냥 이뤄진 거 아니에요.
그 경험과 기백을 살려 문화재 공부에 진력하면 좋은 안내, 훌륭한 길잡이 문제 없습니다." 어르신들의 한결 같은 자신감이다.
무릎에 손자들을 앉히고 옛날 이야기를 풀어놓으시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제 고궁이나 능에 가면 그런 친근한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박제된 역사가 아닌,어르신들의 구수한 안내설명을 타고 살아 숨쉬는 역사의 향기를 맛볼 수 있게 됐다.
정용성 기자 herr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