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의 잘못된 선택은 인식의 오류를 낳는다. 요즘 유행하는 '양극화(polarization)'란 용어가 그런 경우다. 양극화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라는 복잡한 단어를 동원해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미 온 국민이 다 아는 용어가 됐다. 대통령이 TV의 프라임타임을 빌려 이 주제로 강의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 보니 요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양극화란 용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소득도,소비도,시장도 모두 양극화다. 사고의 양극화,행동의 양극화는 물론이다. 양극화가 신조어는 아니다. 15세기 말 이후 인클로저 현상이 빚어진 영국에서 중ㆍ소농이 농업 노동자 또는 도시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과정을 설명한 용어가 양극화다. 국내에서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얇아지면서부터지만 학문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용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 용어를 문제 삼는 것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체계가 의심스러워서다. 바로 이분법적 사고다. 하긴 요즘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판을 칠 때도 없었다. '우리(we)'가 아니면 모두가 '그들(them)'이다. 모든 계층을 강자와 약자로 나누고,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눈다. 전형적인 좌파의 버릇이다. 그들에게 대기업은 악(惡)이고 중소기업은 선(善)이다. 지배주주와 소액주주,재단과 교사,강남과 비강남도 모든 그런 식의 잣대로 구분된다. 중소기업이 몰락하는 것은 대기업의 횡포 탓이고 소액주주들은 지배주주의 전횡 탓에 제 몫을 찾지 못한다. 비리 투성이의 사학재단은 교사들의 자율권과 학생들의 학습권을 위축시키고 있고 강남 사람들은 집값을 올려 비강남권 국민들을 울린다. 이런 방식으로 갈등과 불만을 정책 추진의 원동력으로 삼다 보니 주요 정책에는 이분법적 요소가 곳곳에 묻어난다. '그들'을 만들어 '우리'의 입맛에 맞게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8ㆍ31 부동산대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8ㆍ31 정책광고에서 '97%를 위한 정책'이란 표현을 썼다. 3%의 '가상의 적'을 만들어 97%의 지지를 얻어내겠다는 생각이었던 셈이다. 강남 주민들을 죄다 '투기꾼'으로 몰아붙이는 대통령과 고위 관료들의 발언도 정책 추진의 모멘텀을 강남 주민과 비강남 주민의 갈등에서 찾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양극화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기업 투자 부진에서 기인한 저성장과 그에 따른 일자리 부족 현상이라는 문제의 핵심은 설 땅이 없다. 국민들의 뇌리에는 오로지 저소득층의 어려움이 고소득층의 독식 때문이라는 묘한 뉘앙스만 남을 뿐이다. '성장동력 확충방안'이나 '중산층 활성화 방안' '일자리 창출 대책'쯤으로 표현하면 될 사안을 양극화라는 사회적 갈등 구조로 몰아붙이니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 기업의 투자를 부추겨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신 증세라는 무리한 방법이 동원된 배경이다. 모호한 용어로 포장해 국민의 인식을 오도하는 정책,사회를 둘로 갈라 문제를 푸는 방식은 심각한 후유증만 남길 뿐이다. 정부가 정말로 양극화 문제를 풀어볼 생각이라면 용어부터 바꿔보길 권한다. 김정호 경제부장 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