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소운 < 시인 >
봄이 시작되는 입춘(立春)이다.
분명 눈으로는 입춘으로 읽는데 마음은 자꾸만 고향(故鄕)으로 읽힌다.
왜 그럴까.
추운 겨울이 지난 뒤의 '봄'이라는 그 어감에서 오는 포근함과 '고향'이라는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이 유사하기 때문일까.
객지라는 어설픈 단어보다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언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 따뜻해진다.
지난 설날에도 고향을 찾는 차량의 행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게 몇 시간을 도로 위에서 고생하면서도 모두들 고향을 찾는다.
무엇이 우리를 그곳으로 끌어당기는 걸까.
그곳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하룻밤 내지 몇 시간에 불과하다.
어쩌면 오고가는 시간보다 더 작은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고향의 기(氣)를 엄청나게 받아오는 듯하다.
'고향의 봄'은 유독 다른 곳보다 더 빨리 오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낯섦'과 '익숙함'의 차이가 아닐는지.그래서 다 같이 오는 봄이지만 굳이 '고향의 봄'이라고 하는 이유도 고향의 논둑과 밭두렁 그 모든 것이 눈에 익다 보니 금방 마음으로 전달된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외국여행을 할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이 음식이라고 한다.
기후 차이는 옷을 좀 더 챙기든지 덜 챙기든지 하면 되는 것인데,오래 길들여진 입맛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음식도 익숙한 것은 '향'이고 낯선 것은 '악취'라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었다.
때로는 익숙한 것보다 낯선 곳에서의 자유로움이 좋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대할 때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거나 또 가슴이 무너지도록 슬플 때 경쾌한 음악을 들어야 하겠지만 더 슬픈 음악이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에 왜 하필 '몸이 나른하다' '맥이 풀린다'는 말을 할까.
들판의 풀포기 하나도 물이 오르려면 엄청난 우주의 기(氣)를 모아야 할 것이다.
'나른하고 맥이 풀린다'고 할 때,우리 몸도 겨울 동안 닫혀 있던 안의 기를 열고 밖의 새 기운을 받아들이는 '안과 밖의 기 싸움'으로 지쳐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새해 들어 벌써 문상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러다 보니 얼음이 풀리는 봄철에 유독 노인분이 세상을 많이 떠나는 이유도 자연과 소통하기 위한 기 싸움에서 오는 현상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생성'과'소멸'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우주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자연은 불감을 모르고 우주의 흐름에 제 때 반응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점점 닫혀간다.
내성이 생긴 건지,감각이 둔해져가는 건지,큰 일이 생겨도 별 반응이 없다.
옆집에서 누가 굶고 있는지,중환자가 있는지도 모르는 닫힌 생활.이것을 문명의 혜택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할수록 삶의 스산함만 묻어난다.
이렇게 닫힌 세계에서는 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
자기 곁을 돌아보는 나눔의 시간,조건 없이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그런 세상이 빨리 오길 꿈꾸어본다.
산다는 건 어느 순간 나를 기억해내기도 하고 망각의 단애에 내던지기도 하는 일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굳게 닫혔던 우리네 마음도 봄눈 녹이듯 그렇게 한 번 빗장을 풀어보자.소외된 이웃에 따뜻한 손길을 베풀고 나른한 일상에도 희망의 활력을 불어넣어 보자.그러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 귀를 기울여 우주가 몸 푸는 소리를 들어보자.
햇살이 온 만상에 부드럽게 입맞춤하는 동안 그 입김으로 얼었던 강물이 몸을 풀어내는 소리,만삭이 된 산모처럼 툭 툭 땅이 실금을 내며 갈라지는 소리,꽃가지가 새록새록 수액을 빨아들이는 소리,아무리 겨울이 춥다 해도 봄은 오지 않는가.
지금 대지는 몸 푸느라 한창 오르가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