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권위주의 문화의 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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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元巖 < 홍익대 교수· 경제학 >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권위는 사람들로부터 자발적인 복종과 신뢰를 끌어내는 힘이지만, 권위주의는 권위를 앞세워서 복종과 신뢰를 강요한다. 따라서 권위는 확립해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타파해야 한다.
최근 황우석 교수의 2005년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태를 접하면서 권위와 권위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그 동안 많은 연구들로부터 학문적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그가 왜 그랬을까.
국민들마다 가져보는 의문이다.
어떤 외신은 이런 불행한 사태가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세계 최첨단의 연구라고 할지라도 결국 그 나라의 문화에 지배될 수밖에 없음을 뼈아프게 지적하는 대목이다.
어디 '빨리빨리' 문화뿐이겠는가.
필자는 아직도 남아있는 권위주의 문화가 이런 사태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권위가 커질수록 권위주의의 위험도 커진다.
이미 '국민적 영웅'이 된 황 교수와 함께 논문을 작성한 동료 교수들과 연구원들 중 그 누구도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황 교수는 권위를 앞세워서 복종과 신뢰를 강요한 측면이 많았다.
참여정부는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 18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 3주년을 기념해 열린 당·정·청 워크숍에서 이해찬 국무총리는 참여정부 3년 동안 정경유착과 권위주의를 청산했다고 진단했다.
과연 그럴까. 혹시 과거의 개발독재 권위주의 대신 진보개혁형 권위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는 도처에서 권위주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
내외귀빈이 참석하는 큰 행사장에 가보면,가슴에 꽃을 단 귀빈들을 보게 된다.
행사를 빛내기 위해 꽃을 달았다면 왜 일부 귀빈에게만 꽃을 달아주는지 모르겠다.
국회의원의 금배지는 예전부터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지적되어 왔다.
17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권위와 출세의 상징인 금배지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아직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배지를 달고 다닌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생들이 교복을 입거나 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소 팔아 아들을 대학에 보낸 부모님은 아들이 교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또 당시에는 대학생 버스요금 할인제도가 있어서 배지를 달지 않으면 요금할인권을 쓰기 어려웠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서 대학생 수가 늘어나고 중고생 교복도 자율화되면서 이런 관행들이 사라지게 됐다.
행사장에서 '꽃을 단 귀빈'도 요즘 젊은이들이 눈에는 생뚱맞게 보일 것이다.
관객 800만명을 돌파한 2005년의 화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정신장애를 가진 여주인공이 머리에 꽃을 달고 나온다.
그런데 그녀가 머리에 꽂은 꽃은 어쩐지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이나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자 이런 생뚱맞은 상황을 나타내는 대사가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래 머리에 꽃 꼽았습네다."
마침 대법원은 권위주의적이라고 지적을 받아 온 법정구조를 바꾼다고 한다. 위압감을 줄이기 위해 판사들이 앉는 법대의 높이를 낮추고,원고와 피고가 서로 마주 보고 앉게 할 것이라고 한다.
법대가 낮아지면 법관이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느낄 수 있다는 반론도 있으나 권위주의적 법정구조를 바꾼다고 법관의 권위가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는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가 화두가 될 것이며, 여당은 양극화 해소와 동반 성장을 위해 사회부총리제 신설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권위주의 시절처럼 새로운 직제를 신설한다고 해서 양극화가 해소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 모두 불필요한 대립과 반목을 접고,서로 이해하고 타협할 때 양극화의 고통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