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 가고 있지만 증시는 되레 기업들의 자금 조달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해야 할 주식시장이 오히려 기업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상장 기업들이 올 들어 주가 관리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쏟아부은 돈은 증시에서 조달한 자금의 5배를 웃돌고 있다. 여기다 경영 간섭마저 지나쳐 제발로 증시를 떠나는 기업도 느는 추세다. 27일 금융감독원과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9월 말까지 상장 기업들이 유상증자와 기업공개(IPO) 등으로 증시에서 조달한 자금은 유상증자 2조2852억원,IPO 6295억원 등 2조9147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절반에 불과했다. 사상 최대를 기록한 2000년과 비교하면 22% 수준이다. 반면 자사주 취득과 배당에 투입한 돈은 9월 말 현재 14조6132억원에 달했다. 특히 증시 호황에도 불구하고 자사주 취득에 쓴 자금이 4조4671억원으로 증시 개설 이래 처음으로 자금조달액을 앞질렀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 들어 2조1419억원을 자사주 매입에 썼으며 포스코(1조215억원) 현대자동차(6602억원) KT&G(1149억원) 등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또 연초 주주들에게 나눠준 현금 배당액도 10조1461억원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기업들이 국내 증시에서 조달한 순자금(자금 조달액-자금 투입액)은 2003년 마이너스로 전환해 -2조9998억원을 기록한 뒤 △2004년 -6조6876억원 △2005년(9월 말 현재) -11조985억원 등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는커녕 설비 투자나 연구개발에 쓸 자금을 증시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국내 증시의 열악한 자본 조달 기능은 지난해 국가별 증시 자본조달비율(자본조달액/GDP)을 비교한 결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자본조달비율은 0.83%에 그쳐 홍콩(21.96%)의 26분의 1에 불과하며 싱가포르(2.64%) 미국(1.40%) 등에도 훨씬 못 미쳤다. 김형태 증권연구원 부원장은 "기업들의 과도한 주주 환원은 잉여금을 투자보다 주주들의 단기 이익 실현에 사용한 결과로 미래 성장잠재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학균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원은 "국내 증시는 외국인 비중이 높아 주가 상승과 고배당이 경기 활성화로 이어지는 '부(富)의 효과'가 나타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