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자이너들의 감각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런 디자이너들의 옷이 전 세계로 팔려나갈 수 있도록 마케팅만 뒷받침 된다면 서울컬렉션도 파리나 밀라노컬렉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요. 이번 컬렉션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최근 서울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에서 서른 한 번째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박윤수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회장의 얼굴에선 감개무량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가 지난 1990년 진태옥 박항치씨 등 선·후배,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사재를 털어 시작한 'SFAA 서울컬렉션'이 16년이 흐른 지금은 모든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서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한국에선 생소했던 컬렉션이라는 게 너무 궁금해 동료 디자이너 예닐곱명과 함께 도쿄컬렉션을 보러 갔었죠.일본 디자이너들이 한 계절 앞서 유행할 작품들을 선보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바이어들이 수십만달러씩 의상을 사 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울 강남에서 부티크를 운영하는 것에만 만족해하던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요. 그 때 결심했지요. 한국에서도 컬렉션을 열어야겠다고요."


박 회장은 "이제 서울컬렉션은 예술적 성과를 넘어 산업적 성과를 꾀해야 할 단계"라며 "그러기 위해선 컬렉션을 기획하고 마케팅을 전담할 상설 기구를 꾸리는 게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죠.일원화된 집행위원회를 상시 가동해 영화제를 기획·홍보하고 감독들의 작품이 '필름 마켓'을 통해 여러 나라로 팔려나가도록 주선하잖아요."


성공할 가능성은 엿보이지만 아직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디자이너들이 서울컬렉션을 통해 돈을 벌어 '홀로서기'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이 도와야 한다는 게 박 회장의 지론이다.


이를 위해 SFAA는 지난해 가을부터 단독으로 컬렉션을 열지 않고 통합 '서울컬렉션'에 참여하고 있다.


통합 컬렉션은 서울시와 산업자원부가 공동주최하고 SFAA와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KFDA),뉴웨이브인서울(NWS) 등 다른 디자이너 단체들이 공동 주관사로 나선다.


3개 단체가 모여 진행하는 컬렉션엔 서울시 산하 서울패션디자인센터(SFDC)가 국내외 바이어를 섭외하고 디자이너별로 부스를 따로 만들어 마케팅을 도와주고 있다.


박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컬렉션에 대한 민간기업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서울시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선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이번 서울컬렉션에서 SFDC가 열심히 뛰어준 결과 디자이너들이 비즈니스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컬렉션 진행 방식에서도 한 단계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모든 디자이너가 한 장소에서 차례로 패션쇼를 여는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것.앞으로는 컬렉션 개최 시기와 일정은 정해놓더라도 각 디자이너들의 창의성이 마음껏 드러날 수 있도록 무대는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서울컬렉션이라는 큰 틀은 유지하되 개별 디자이너들이 압구정동 거리 한복판에서도,교회에서도,건물 옥상에서도,동물원에서도 자유롭게 패션쇼를 열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한양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윤수 회장은 1978년 앙드레 김,이신우씨 등 유명 디자이너를 배출한 국제복장학원을 통해 패션계에 입문했다.


2년 만인 80년 중앙디자인콘테스트 대상을 받았고 작년엔 산업자원부 장관이 주는 '올해의 패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지금,무대에 작품을 올린다는 것은 신인 때와 어떻게 다를까.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한 번 컬렉션을 마치고 돌아서면 곧바로 다음 시즌에 내놓을 의상 50~60벌을 새로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패션쇼 때마다 신인처럼 떨립니다."


박 회장의 두 딸 소영·소정씨 역시 영국 런던 왕립예술대학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대학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있다.


진태옥·노승은,김동순·송자인씨 등 대를 이어 SFAA 컬렉션에 오르는 모녀(母女) 디자이너들처럼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두 딸을 무대에 세우고 싶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저는 그러고 싶은데 애들이 싫다네요.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은 SFAA 무대에 서지 않겠답니다. 그래서 런던에서 뿌리 내려 성공한 뒤 한국에서 쇼를 열라고 했어요. 저보다 훨씬 뛰어난 디자이너가 될테니 두고 보세요."


데님바지에 블랙 벨벳 재킷을 입은 50대의 톱 디자이너 박윤수도 자식 얘기가 나오자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



[ 박윤수 SFAA 회장 약력 ]


△1949년 서울 출생


△1968년 한양대 응용미술학과 입학


△1978년 국제복장학원에서 패션디자인계 입문


△1980년 중앙디자인콘테스트 대상 수상


△1988년 뉴욕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 참가


△1990년 봄 여름 SFAA 서울컬렉션 개최


△1998년 광주비엔날레 참가


△2003년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회장 취임


△2004년 올해의 디자이너상(산업자원부 장관) 수상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