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지멘스는 극심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 초 노조측에 깜짝 놀랄만한 협상안을 제시했다. 근로시간을 주당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늘리지만 이로 인한 임금 인상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인리히 폰 피어러 지멘스 회장은 이 요구를 노조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인건비가 싸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헝가리로 휴대폰 공장을 옮기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지멘스는 헝가리로 공장을 옮기면 5억2500만유로(63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이미 공장 부지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노조 지도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회사측 요구를 거절하자니 조합원들이 일자리를 몽땅 잃어버릴 수 있고,수용하자니 조합원들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머뭇거릴 수도 없는 일.결국 조합원 투표를 통해 임금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안이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했지만 사용자와 노조 모두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이 같은 지멘스의 협상 결과는 금속산별노조의 '패턴교섭'(산별교섭에 가이드라인으로 삼을 수 있도록 대기업에서 미리 벌이는 협상)으로 작용해 지난해 2월 독일 금속노사 협상에서도 같은 내용이 전격 타결됐다. 독일 금속사용자단체 노트라인 베스트팔렌지부의 한스 마이클 바이스 노사담당이사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경제전쟁이 격화되면서 노조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며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노조도 기업 경쟁력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 유럽에선 규모와 업종에 관계 없이 기업마다 근로시간 연장에 나서고 있다. 독일의 경우 지멘스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대기업을 비롯해 수백개 업체들이 주35시간제를 포기하고 40시간 또는 38시간 근무제로 돌아서고 있다. 다임러 크라이슬러 노조는 지난해 여름 6000명에 달하는 노조원의 일자리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근로시간 연장과 임금 동결에 합의했다. 오펠자동차 독일철도회사 호발트슈베르케조선소 노조도 회사의 근로시간 연장 요구를 받아들였다. 독일 노동현장의 변화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기업들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의 사무용품 제조업체인 스메드 노사는 지난해 주당 36시간 근무제를 40시간으로 연장하는데 합의했다. 공구 및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인 독일 보쉬의 프랑스 현지공장도 주당 근로시간을 1시간 늘렸다.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41.7시간으로 유럽에서 가장 긴 스위스에서도 기계 전기 철도 체신은행 부문 등을 중심으로 근로시간 연장에 잠정 합의한 상태다. 인접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근로시간 연장이 불가피하다는 회사측 설명이 노조로부터 공감을 얻어낸 것이다. 삶의 질 향상을 내세우며 19세기 이후 꾸준히 근로시간 단축에 앞장서왔던 유럽의 노동조합이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바이스 노사담당이사는 "노조가 사용자의 임금인상 없는 근로시간 단축 제안을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라며 "하지만 경제환경이 악화되고 자본이동이 활발해진 상황에서 노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뒤셀도르프(독일)=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