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고이즈미의 사무라이식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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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을 각오한 고독한 결단."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전격 참배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결단'이라는 큰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찾은 17일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신사 정문에 도착한 그는 차에서 내려 빗속을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걸어 들어갔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굳게 입을 다문 비장한 모습이 마치 옛 시대의 사무라이를 연상케 했다.
국내외의 강한 반발을 예상한 듯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한 배경에 대해 하루종일 입을 닫았던 고이즈미는 저녁이 돼서야 심경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그의 첫 마디는 "'마음의 문제'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일본은 평화국가다.
두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참배했다"고 평소 소신을 거듭 밝혔다.
"총리가 아닌 개인 차원의 참배인 만큼 주변국도 이해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총리 취임 후 다섯 번째인 이번 신사 참배를 '개인' 자격으로 행했다고 말했지만,A급 전범이 합사된 신사를 국가 지도자인 '총리'가 참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은 물론 국내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은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국민의 총의라고 보기 어렵다"며 "아시아 각국과 관계 악화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연립정권의 파트너인 공명당은 물론 민주 공산 사민 등 야당 대표들까지 한목소리로 비난에 가세하고 있다.
실제 올해 초 역사교과서 파동을 겪은 뒤 화해 조짐을 보여왔던 아시아 국가들과의 긴장은 다시 고조되고 있다.
한국은 오는 12월로 예정된 한ㆍ일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고,중국은 23일 베이징에서 열릴 중ㆍ일 외무장관 회담을 취소하는 등 강경자세다.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나 1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제1회 동아시아 서밋도 전망이 불투명하게 돼버렸다.
고이즈미 총리의 '소신'이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가려는 아시아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일본국민들이 열망하는 '강력한 일본'의 부활이다.
그는 여론을 누구보다도 잘 읽는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10여년 만에 살아나고 있는 일본 경제와 전체 의석 3분의 2를 넘는 압도적인 국회 장악력을 배경으로 '여론은 내편'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을 수도 있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에 서려면 평화공존 체제가 구축돼야 하고 여기에는 세계 2대 경제대국인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
고이즈미를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은 아시아 국가들과 손잡고 미래로 나갈지,아니면 20세기 초와 같은 대립의 시대로 나갈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실천적 반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최인한 도쿄 특파원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