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어느새 아침 저녁으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한낮엔 불볕더위에 시달리고 한밤엔 열대야로 잠 못이루던 때가 불과 엊그제 같은데, 나흘만 지나면 입추(立秋)라니 가을이 저만치 오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이 유수(流水)와 같다고 느끼는 반면, 늘 여름이거나 늘 겨울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오늘이 어제 같고 그 해가 또 그 해 같은지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생각한단다. 지난 5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을 보러 간 길에 주민들이 수상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톤레삽 호수에 들렀다가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캄보디아의 보트 피플들은 우리식 주민등록에 해당되는 기록이 없는데다 우기와 건기를 빼곤 계절의 변화를 거의 느낄 수 없기에, 출생 후 다섯 해가 지났는지 여섯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해져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아이가 자신의 오른 팔을 올려 왼쪽 귀를 잡을 수 있게 되면 대략 여섯 살이 지났다고 가늠해서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얘기였다. 기껏해야 서너 살 정도 됐음직한 어린아이부터 제법 교복을 갖춰 입은 초등학생들까지,저마다 소쿠리나 대야에 몸을 담근 채 노(?)를 저어 자유자재로 물 위를 오가는 모습을 보자니,한편으로 그들의 빈곤에 깊은 동정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네 아이들 얼굴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해맑은 웃음과 은은한 수줍음을 보면서 잠시 부러움이 스치기도 했다. 각설하고, 계절 따라 살같이 흐르는 시간이 못내 아쉬웠던 탓일까, 우리네 삶은 "남들 따라 빨리 빨리" 진행되는 속도전에 익숙해온 듯하다. 휴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너도 나도 짐 꾸려 떠나기에 바쁜지라, 서울 거리는 텅 비어 제법 운전할 맛이 난다지만 전국의 해안과 유명 관광지 주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교통체증이 이어지고, 여전히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낙후된 휴가시설로 인해 여름 한철 장사의 바가지 상혼이 판을 친다는 뉴스가 단골로 등장한다. 이제 주5일제 근무도 정착돼가고 있고 휴가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 친근하게 자리잡은 만큼 격조와 품위,그리고 멋과 여유를 담은 '휴가문화'를 향해 우리의 관심을 옮겨감이 어떨는지. 우선 효율성과 생산성을 명분으로 휴가 시기를 여름 한철로 못 박고 있는 관행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물론 한여름 폭염 하에선 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긴 하지만 요즘은 냉방시설 없는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휴가 성수기와 비수기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그다지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아이들 방학에 맞춘다는 명분도 간과할 순 없겠지만 중학교만 들어가도 가족여행을 탐탁하지 않아 하는 현실에다 실제 가족단위 여행의 비중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없다고 보면 여름방학 기간 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으리라. 휴가 기간보다 더 큰 숙제는 휴가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일일 게다. 소신껏 휴가를 즐기기보다는 남들 눈치 보기 바쁘다 보니 '무늬만' 휴가로 포장한 채 돌아오는 길엔 예기치 않았던 휴가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열심히 일한 당신 신용카드 쓰러 떠나라"는 소비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휴가는 늘 주머니 사정에 부담을 안겨줄 것이요. 항상 새롭고 보다 자극적인 휴가를 찾아 헤매는 한 휴가의 뒤끝은 공허감과 쓸쓸함으로 가득 찰 가능성이 높다. 언젠가 여행길에 만났던 풍경 하나. 시원한 나무 그늘에 몸을 기댄 채 책 속에 얼굴을 묻기도 하고,엎드려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던 모습.그렇게 몸을 맡기고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는 휴가의 참맛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