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원장 >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의료산업화를 놓고 의료계와 학계, 시민단체의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그러나 논란의 초점이 영리법인병원과 민간의료보험 도입 문제에만 집중된데다 의료를 둘러싼 이념과 가치관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어, 정작 중요한 의료산업화의 실체가 다루어지지 못할까 우려된다. 의료의 공공성과 시장경제적 요소의 접목 문제는 세계 각국이 고민하고 있는 과제이고,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의료가 이미 첨단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산업적 가치를 활용해 국부를 창출하기 위한 전략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21세기를 주도할 경제성장 엔진으로 바이오산업을 꼽는데 공감하지 않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바이오산업의 핵심으로 병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병원은 단순히 고급 노동력에 의존하는 서비스업이 아니라 의료지식과 기술을 창출하고 전달하는 지식산업이다. 다시 말해, 첨단 바이오 의료 기술 개발의 원천이자 개발된 기술과 의약품 등 제품의 최종 수요처로서 이른바 바이오산업 가치사슬의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신약개발에 투자되는 비용과 과정의 약 40%를 차지하는 임상시험의 대부분이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첨단 의료기술일수록 병원의 역할은 더욱 크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은 병원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바이오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병원의 역할은 확대돼 가고 있으며, 관련 보건산업과의 밀접한 연계가 중요해지고 있다. 선진국의 사례를 들자면 미국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의 경우 규모는 국내 대형병원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연구개발에 쓰이는 예산은 연간 4억달러, 우리 돈으로 4000억여원에 이른다. 이 병원은 이를 바탕으로 생명공학분야 특허만 197건을 보유하고 있다. 특허 보유 건수로는 하버드 대학, MIT 등 명문 대학을 제치고 보스턴지역 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병원은 의과대학과 더불어 고급인력 첨단장비 임상자료를 보유한 바이오분야 연구개발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병원은 그동안 환자진료에만 치중한 나머지 이같은 역할을 소홀히 해왔다. 여기에는 의료수가 등 제도적인 요인도 있었겠으나, 그동안 연구개발과 산업화에 있어 병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었다는 점을 주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의 병원, 의료계의 연구 잠재력은 매우 높다. 지난 30여년간 국내의 최우수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진학해 왔으며, 불임치료, 암수술 등 일부 의료기술은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들어 병원을 중심으로 줄기세포와 유전체 연구 등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세계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병원, 의료계의 우수한 인적.물적 자원을 연구개발 및 산업화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병원 등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관련 기업이 상호 연계돼 시너지를 통해 새로운 질병 치료기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기술이전과 창업 등이 긴밀하게 연계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의료 클러스터의 구축이 그 방안이 될 것이다. 질병 중심의 연구를 통해 난치질환의 극복은 물론 산업적 성과를 거둔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 이러한 의료 클러스터의 구축은 그 산업적 효과를 통해 지역의 균형발전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