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량진의 모 공무원시험준비학원에 다니는 최기태씨(30)는 국내 굴지의 H그룹 핵심계열사에 3년간 다니다 최근 사표를 썼다. 검찰직 9급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최씨는 "과장 고참만 되면 잘릴 걱정을 하는 직장선배들이 '더 늦기 전에 공무원 자리를 잡아라'고 거듭 충고해서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를 마다하고 서울시 9급 자리를 선택한 S대 인문대 출신 김모씨(24·여)는 "삼성보다 일하는 보람은 못할지 모르지만 오래 일할 수 있고 스트레스도 덜한 공무원을 선택한 데 대해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주위에서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지난달 G그룹의 한 계열사에 합격한 박모씨(27)는 며칠 후 한국서부발전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고 망설임 없이 발전회사를 선택했다. 그는 "민간기업에 가면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자리가 불안한 게 현실이라는 얘기를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었다"면서 "당초 공무원 아니면 공기업 입사를 원했고 민간기업은 들러리로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우수인력의 공무원·공기업 선호현상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과거엔 법대생 상대생을 중심으로 고시 열풍이 기승을 부렸으나 최근 들어선 삼성 현대 같은 일류 대기업마저 기피하고 하위직이라도 공무원이나 공기업 일자리를 선호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기업 지원자들의 토익점수가 민간기업에 비해 무려 60~70점 이상 높을 정도로 인력 수준의 편차가 심해지고 있다.? 우수인력의 공공부문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해지자 일부 민간기업들은 인재 모셔오기에 나서는 등 비상이 걸렸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이 나라경제의 앞날을 결정짓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우수한 젊은이들이 공공부문에 너무 몰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인적자원 배분을 왜곡시키고 국가경쟁력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고 우려했다. ◆공무원, 대학생 희망 직업 부동의 1위 최근 인터넷 취업포털 잡링크가 대학생 6463명을 대상으로 희망 직업을 조사한 결과 공무원이 단연 1위(543명)로 나왔다. 외환위기 이후 각종 취업 관련 조사에서 공무원 공기업 교사 등 이른바 '철밥통 직장'이 대학생 직업선호도에서 갈수록 인기를 누리고 있다. 7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신모씨(27)는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공무원이 되면 민간기업에 비해 길게는 십수년 이상 오래 일할 수 있고 스트레스도 적기 때문에 결코 손해가 아니다"면서 일류 민간기업에 다니면서 주말반 공무원학원에 다니는 선배들도 많다고 전했다. 경찰직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정준희씨(30)는 "KCC에 근무하다 그만뒀다"며 "대기업의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보수가 좀 적더라도 공무원이 나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 학점 토익 우수학생 공기업 러시 신입사원 학점이나 토익점수를 비교해보면 공공부문에 대한 우수인력 러시 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3월 말~4월 초에 정부산하 12개 공기업 합격자들의 토익 평균 점수는 840.7점. 이는 40대 민간대기업(777.8점)에 비해 60점 이상 높은 것이다. 한전 같은 메이저급이 아닌 이른바 이류 공기업의 사무직 최종합격자 토익 평균 점수가 무려 970점에 달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 모 공사 관계자는 "학점은 대부분 4.5 만점 기준으로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정도되어야 합격선"이라면서 "너무 우수한 인력이 몰려 인재 낭비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한전의 인사담당자는 "작년 봄에 입사한 1200여명 중 현재까지 이직한 사람이 10명 미만"이라며 공기업 선호를 실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외대 취업지원센터의 임현철씨(36)는 "공기업과 민간 일류기업 양쪽에 합격한 학생이 민간기업에 갔다는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장기화하면 국가경쟁력에 걸림돌 전문가들은 공공부문 러시에 대해 "직장생활 전 기간에 걸쳐 받는 총보상(급여 복지후생 스트레스정도 등)을 따져볼 때 공공부분이 당장 급여는 적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고 업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민간기업보다 나은게 현실"이라면서 "철저히 계산적인 신세대들이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런 풍조에 대해 국가적으론 물론 개인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 전무는 "요즘 사람들은 풍족하게 자라 안정적인 직장만을 선호하다보니 적재적소에 인재들이 가지 않고 있다"며 "진취적인 사회분위기를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원우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도 "지금 안정적이라고 해서 공공부분이 앞으로도 계속 무풍지대로 남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라면서 "공공부문도 빠르게 경쟁체제로 바뀔 것이므로 ‘묻지마 식’ 공공부문 지원은 금물”이라고 충고했다. 안정락.김현예.이상은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