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부 규제 '품질관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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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 홍익대 교수ㆍ경제학 >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은행(IBRD)이 각국의 규제품질과 수준에 관한 국제비교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선진국과 경쟁상대국들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다.
아직도 정부규제가 우리나라 국가경쟁력 향상에 장애가 되고 있음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결과다.
우리나라의 정부규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들은 물론이고 전세계를 누비면서 기업 활동을 하는 다국적기업들조차 한국에서는 규제가 심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나라에 규제가 많아서가 아니라, 규제품질이 낮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규제품질을 낮추는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건 많은 규제가 '원칙금지, 허용 예외'방식이란 점이다.이런 규제는 기본적으로 민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도입된 것이다.민간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자유롭게 풀어 놓으면 엉망이 되기 때문에 정부가 미리 규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출자총액규제는 출자 상한선을 정부가 미리 정해 놓고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투자는 공무원이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근로자 파견 업종 제한도 마찬가지다.
이런 규제는 기술과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민간 경제활동의 뒷다리를 잡게 된다.
결과적으로 민간은 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고, 창의성과 다양성은 사라지고 하향평준화가 초래된다.
우리나라 정부규제가 품질이 낮은 또다른 이유는 대부분 절차와 기준이 모호하고 포괄적이어서 결과를 예측하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기업활동의 불확실성을 높여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은 규제리스크가 높은 나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규제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게 규제 집행의 문제다.
많은 규제가 비현실적기준과 절차를 요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법대로 집행할 의사나 능력도 없으면서 명분과 여론을 근거로 도입된다.
조세,환경,안전,고용,건축 등에 이런 규제가 많다.
이런 규제는 전형적으로 준수율이 낮다.
규제준수율이 낮으면 법과 현실이 따로 놀게 되어,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될 뿐 아니라 사실상 무규제 상태가 되어 정책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법을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우리나라의 규제가 이같이 낮은 품질을 갖게 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행정만능 규제만능주의 풍조가 근본 원인이다. 공무원들이 규제를 선호하는 건 당연하지만, 요즘은 각종 시민단체 이익단체들도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정부에 이런 저런 규제를 만들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여기에 명분을 중시하는 국민정서와 사고만 터지면 끓어오르는 냄비여론,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도 저질규제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우리나라 규제 품질이 저하된 건 현 정부가 지닌 시장과 정부기능에 대한 근본인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시장기능에 비해 정부기능에 대한 신뢰가 높은 것처럼 보인다.
정책목표를 지시 통제 적발 처벌방식의 고전적 규제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각종 사회정책과 개혁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할당제,의무제,허가제,가격규제와 같은 고강도 규제가 계속 도입 강화되고 있다.
지역균형발전,투기억제,복지와 형평 등의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비용의 규제들이 면밀한 품질관리 없이 명분과 여론을 업고 도입되고 있으며,이들 규제는 덩어리를 이루며 성역화되고 있다.
정부가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키 위해 규제수단을 사용하는 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문제는 목적이 정당하므로 무슨 수단이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단순논리다.규제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규제를 도입하기 전에 규제 아닌 다른 대안은 없는지,규제를 도입하더라도 민간의 창의와 자율, 시장기능을 존중하는 고품질의 규제수단은 없는지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