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의 바위위에 세운 '고독의 城'..스리랑카 '시기리야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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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각형 모양의 인도 대륙 아래에 눈물 방울같은 한 점 섬이 떠 있다. 흔히 '인도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차와 보석의 나라,스리랑카다.
스리랑카란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
지난해 말 지진해일로 천혜의 해변 리조트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스리랑카 여행의 진짜 보물은 풍부한 역사문화 유적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6곳,세계자연유산도 1곳(싱하라자 정글) 있다.
섬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도에는 A급 하이웨이라고 나와 있지만 왕복 2차선에 노면마저 고르지 않은 길을 곡예하듯 달리는 차들….
야자수와 바나나 등이 즐비한 열대의 숲으로 난 길을 5~6시간쯤 달렸을까.
이국의 낯선 풍경도 식상해질 즈음,평원 위로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불쑥 눈 앞에 나타난다.
산이라기엔 좀 작은데다 꼭대기가 너무 뭉툭해보이고,그냥 바위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하다.
스리랑카 제1의 도시 콜롬보에서 동북쪽으로 166km 떨어진 '시기리야 록'(Sigiriya Rock).
지난 1982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으로 '사자바위'라고도 불리는 바위 요새다.
시기리야 요새의 고도는 해발 370m,땅 위로 솟은 바위 높이만 200m에 이른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바위기둥을 땅에 박아놓은 듯하다.
도대체 누가 왜 평원의 한가운데 이런 바위요새를 만들었을까.
인간의 욕심이 부른 광기와 비극의 역사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5세기 스리랑카를 통치하던 다투세나왕에게는 배 다른 두 왕자가 있었다.
평민 여인에게서 낳은 장남 카샤파와 왕족 혈통의 여인이 낳은 차남 목갈라나. 카샤파는 출중한 외모와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왕족 혈통을 이어받은 동생에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결국 카샤파는 아버지를 감금하고 왕위를 찬탈했고,동생 목갈라는 이런 형을 증오하며 인도로 망명했다.
카사퍄는 부왕에게 숨긴 재산을 다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다투세나왕은 "내 재산은 내가 건설한 저 칼라웨와 호수뿐"이라며 버텼고, 분노한 카사퍄는 부왕을 죽이고 말았다.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과 고통 때문이었을까, 동생의 보복이 두려워서였을까.
혼자 왕국을 차지한 카사퍄는 왕도 아누라다푸라에서 80km 떨어진 시기리야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꼭대기에 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7년간의 공사 끝에 카사퍄는 왕궁을 시기리야로 옮기고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러나 4년 후 동생 목갈라나가 인도에서 군대를 끌고 쳐들어오자 카사퍄는 맞서 싸우다 져 자결했다.
목갈라나는 시기리야의 왕궁을 스님들에게 주고 왕도를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옮겼다.
'시기리야 록'에 오르기 위해 바위요새 아래 네모진 성곽 바깥의 해자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드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붉은 벽돌로 만든 담장과 수영장, 연못과 산책로 등의 흔적이 당시 궁전의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바위요새 바로 밑에 이르자 거대한 무게가 느껴진다.
여기부터 정상까지는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다.
바위 요새의 꼭대기까지 무려 1,2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게 안내자의 설명.
염천의 더위 속에 좁고 미끄러운 대리석 계단을 오르자니 금세 땀이 뚝뚝 떨어진다.
대리석 계단을 다 오르면 바위산 허리를 띠처럼 두르고 있는 황토빛의 ‘거울회랑’이 시작된다.
거울회랑은 높이 3m의 벽에 칠을 입히고 그 위에 달걀 흰자와 꿀, 석회를 섞어 바른 뒤 표면을 문질러 거울처럼 윤을 낸 것으로, 멀리서도 회랑을 오가는 이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한다.
벽에는 다투세나와 카샤파, 목갈라나의 운명과 바위산의 웅장함을 노래한 서사시 등이 싱할라어로 새겨져있다.
거울회랑의 초입에서 나선형의 철제 계단을 타고 수직으로 오르면 바위면에 새겨진 벽화를 만나게 된다.
‘시기리야 레이디’로 유명한 미인도다.
풍만하고 요염한 자태의 여인들이 금새라도 살아나올듯 뚜렷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카사퍄가 자신이 죽인 아버지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 바위산 주변에 500여 명의 미인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은 18명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시기리야 락’을 되살린 것이 이 미인도들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875년 한 영국인이 이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다 바위벽의 그림들을 처음 발견, 1400년만에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미인도를 보고 다시 내려와 거울회랑을 따라 이동하면 바위산 북쪽의 광장, ‘사자의 입구’에 이른다.
날카로운 발톱을 내민 사자의 거대한 두 발 사이로 들어서면 요새의 정상까지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발 아래를 보면 조금만 잘못 디뎌도 떨어질 것 같아 아찔하다.
드디어 바위산 꼭대기.
4800여 평의 넓고 평평한 대지에 왕궁 건물터와 저수지·정원·연회장·수영장 등의 흔적이 남아 웅장했을 옛 모습을 가늠케 한다.
카샤파왕이 앉아서 무희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대리석 의자도 남아 있다.
왕궁터에 서니 사방팔방이 눈 아래 다 들어오지만 귀에 들리는 건 바람소리와 정적뿐….
“이 황금의 궁전, 그 화려하고 넓은 문. 모든 것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사라져갔네”라는 거울회랑의 시구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시기리야 요새에서 내려와 서남쪽 인근의 담불라 석굴사원으로 향한다.
평원에 불쑥 솟은 거대한 흑갈색 바위산에 조성돼 있는 이 석굴사원은 스리랑카 최대, 최고의 동굴사원군.
2100㎡의 면적에 5개의 석굴, 157개의 불상이 조성돼 있다.
5개의 석굴중 3개는 기원전 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남인도의 침략을 받은 왕이 담불라로 피신했다가 스님들의 도움을 받은 뒤 수도를 회복, 감사의 표시로 석굴을 만들어 기증했다고 한다.
석굴사원에서 나와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스리랑카의 마지막 왕조가 있었던 고도 캔디를 보기 위해서다.
캔디는 섬 내륙의 고원분지에 그림같은 캔디호를 끼고 앉은 곳으로 도시 전체가 문화유적이다.
그중에서도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모신 달라다 말리가와(불치사·佛齒寺)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사원 참배는 하루 세 번 허용되지만 사리를 참배하려면 몇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매일 저녁 불치사 부근 캔디문화센터에서 열리는 전통춤 공연 ‘캔디언 댄스’도 흥미롭다.
캔디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다시 콜롬보에 닿는다.
도중에 부모 잃은 코끼리들을 보호하는 케갈레의 코끼리고아원에 들러 동심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다.
콜롬보(스리랑카)=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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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수첩 ]
적도와 가까운 열대지역역인 스리랑카는 남한의 3분의2 정도 크기의 섬나라다.
1900백만명의 인구중 69%가 불교신자인 불교국가다.
싱할라족(74%)과 타밀족(18%)이 주요 원주민.
홍차와 블루 사파이어, 공예품, 향신료 등의 특산품이 있다.
지진해일 피해가 심했던 동남해안 지역의 호텔 등은 복구됐으나, 주민들의 생활기반시설은 아직 복구 중이다.
직항편이 없어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한국보다 3시간 늦다.
비자없이 한달간 여행할 수 있다.
직항편이 없어 여행상품은 많지 않다.
가야여행사(02-536-4200)는 싱가포르를 거쳐 스리랑카의 콜롬보 시내, 시기리야 록·불치사·담불라 석굴사원·콜롬보 해변 등을 둘러보는 4박5일 상품을 내놨다.
4명이상 매일 출발한다.
2인1실 기준 1인당 129만원.
(02)536-4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