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의 불법파업이 일어났던 지난 2003년 5월.사상 초유의 물류대란이 빚어져 기업들마다 자사 제품을 운송하지 못해 아우성을 쳤지만 정부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을 고집했다.나라 경제가 마비될 판이었지만 “불법파업이라도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한다”며 강건너 불구경하듯 안이하게 대응했다. 당시 권기홍 노동부장관은 “화물연대의 요구가 틀리지 않는데 불법행동에 대해 엄단하기만 하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겠다”고 밝혔다.한마디로 화물연대 파업이 일어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불법행위를 벌이더라도 용인하겠다는 얘기다. 이같은 무원칙한 대응탓인지 불법파업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노동현장은 장기파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홍역을 앓았다. 화물연대파업을 비롯 철도노조,조흥은행,현대차노조 파업이 유행병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정부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법과 원칙''대화와 타협'사이를 오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자 노동계의 파업은 그칠줄 몰랐다. 불법파업을 해도 정부는 나몰라라 방관했고 노조들은 너도나도 파업대열에 합류했다. 친노(親勞)정책을 표방한 정부는 법과 원칙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불법파업을 부추긴 것이다. 당시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이 비판을 받던 2003년 5월 한경밀레니엄 포럼에 참석, "정부가 철도노조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은 잘못된 게 아니냐"는 학자들의 질문에 "노조는 정치집단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답변해 참석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정부가 불법파업에 무원칙하게 대응하는 것도 문제지만 단위사업장 노사분규에 깊숙이 개입해 "감놔라 배놔라"하며 훈수를 두는 것도 고쳐야할 병폐로 지적되고 있다. 63일 간의 장기파업을 겪던 두산중공업은 지난 2003년 3월 당시 권기홍 노동부 장관의 중재로 파업을 극적으로 타결했다. 정부가 낸 중재안은 노조측에 유리한 조항들 일색이지만 회사측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거절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부는 노사현장의 자율원칙을 스스로 깨며 손배?가압류 철회,무노동유임금 부분적용 등을 제시,사용자측을 압박한 것이다. 막 출범한 정권의 노동부 장관이 직접 내려와 중재를 나서는데 아무리 불리한 중재안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정부가 노사자율원칙을 깨며 노동운동을 왜곡시키는 행위는 노동행정의 고질병 중 하나다. 시계바늘을 외환위기 직후인 98년으로 돌려보자.당시 현대자동차는 정리해고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노사갈등을 빚고 있었다. DJ정부는 이때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를 단장으로 하는 중재단을 현지에 급파,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했다. 현대차 노조가 정리해고에 반발하며 불법파업을 벌여 사법당국이 공권력 투입을 결정했을때 중재단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정치권이 문제를 그르친다는 비난의 여론에도 불구,공권력 투입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정치권은 회사측에 중재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회사측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결국 현대차의 정리해고자는 당초 수천명에서 정치권 중재단과 노동부 장관 등의 잇따른 개입을 겪으면서 2백77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 당시 외부개입없이 노사자율로 문제가 해결됐으면 현대차 노사관행은 크게 개선됐을 것으로 노동전문가들은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정부나 정치권이 법과 원칙도 없이 노사 관계에 개입,문제를 서둘러 봉합함으로써 노동운동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결국 내몫만 챙기려는 대기업노조의 막무가내식 노동운동은 정부의 무원칙이 부추겼다는 것이다. 원칙없는 노동행정에 대한 비난이 거센 때문인지 지난해부터 불법파업에 대한 정부의 대응전략이 많이 바뀌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대기업노조의 집단이기주의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으며 김대환 노동부 장관도 법과 원칙에 따라 불법파업을 해결해나가고 있다. 진보성향의 학자출신인 김 장관이 대화와 타협보다는 '법대로'를 원칙으로 삼자 재계와 일반국민들이 많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김 장관은 지난해 GS칼텍스(구 LG칼텍스정유),서울지하철,공무원노조의 파업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을 때 법과 원칙을 들이댔다. 전임 권기홍 장관 처럼 대화와 타협을 들먹이는 인기영합주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덕분인지 노사현장은 질서를 찾아가고 있다는 평가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