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1의 전통제조업 중심 공업도시 울산.'산업수도'로 불리며 한국의 경제발전을 상징해온 이 도시가 지금 '정체냐 재도약이냐'의 갈림길에서 고심하고 있다. 30년 넘게 지역경제를 이끌어온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하이스코 등 대기업들이 중국 등 해외투자에 열을 올리면서 지역경제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한 지 오래다. "아직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순위가 높다고 하지만 '수명이 다해가는 늙은 유실수에 열린 과실을 따먹는 꼴'일 뿐 5년,10년을 내다본 투자나 장기 비전이 없다보니 지역경제의 위기감은 오히려 크다"는 게 지역경제인들의 이구동성이다. 경북 구미도 전자공단의 절정에 달한 정보기술(IT) 제품 수출 덕분에 다른 지역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 IT산업 추격 속도가 빨라질수록 구미는 내리막길이라는 강박감이 만연해있다"고 구미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말했다. 울산 구미에서 시작된 저기압은 창원 포항 광양 대불 등지로 급속하게 번지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추격으로 넛크래커(nut-cracker·선진국에는 기술과 품질 경쟁에서,개발도상국에는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것) 처지에 놓인 전통산업 분야가 늘어나는 만큼 기존 지역 거점들의 고민은 커지는 양상이다. 이 도시들은 "지역 균형발전은 물론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선 기존 거점 도시들의 범정부적인 '르네상스' 전략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정부의 정책방향은 판이하다. 90년대 이후 지역 거점도시들의 쇠퇴가 본격화됐는데도 역대 정부는 지역 거점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기보다는 낙후지역에 공항 도로 공단을 분산하는 '정치적 생색용 개발전략'에 치중해 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 들어선 '획기적인 지역균형발전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행정도시에서부터 기업도시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도시 건설 계획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임정덕 부산대 교수는 "한정된 지역 투자 재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은 이미 인프라 등이 확충된 기존 거점도시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라면서 "신도시 건설은 정치적으론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기존 도시의 쇠퇴를 부추기고 부동산 투기를 유발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고 지적했다. 김치행 포항시 부시장은 "새로운 도시(열린우리당 추정 행정도시 건설비용 9조4천억원) 1개를 건설하는 돈을 포항 같은 기존 도시의 산업구조조정이나 도시 문화시설 확충 등을 통한 '르네상스'를 이끄는 데로 돌리면 10개 도시를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면서 "행정중심도시와 기업도시를 개발 소외지에 집중 건설하는 것은 재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부처마다 '낙후지역 균형발전 개발투자' 경쟁 현 정부 출범 이후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행정자치부 등 지역과 관련 있는 부처들마다 '낙후지역 발전,지역 균형발전' 명분을 내세워 다투어 ○ ○지구, ○ ○특구 등을 지정하고 재정 투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산자부가 내놓은 혁신클러스터 프로젝트만 하더라도 '거점도시에 대한 선택과 집중'과는 거리가 멀다. 복득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실리콘밸리가 모델인 혁신클러스터를 전국 각지에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으로 전세계적으로 봐도 성공 사례가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울산시와 경주시가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경주시 경계까지 60여만평을 자동차 관련 산업특화단지로 조성키로 한 오토밸리 프로젝트처럼 각종 인프라 수준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존 거점을 기반으로 혁신클러스터를 만들어 지역산업은 물론 도시 경쟁력을 함께 키우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임길진 미국 미시간주립대 석좌교수는 앞서 "행정도시 건설 재원을 기존 도시에 투자함으로써 균형발전 등 원래의 정책목표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희망의 싹-기업들이 키운다 '지방 거점도시 르네상스'에 대한 기대감은 중앙 정부보다 기업들에서 엿보인다. 광주시는 최근 시내 도로 두 곳의 명칭을 지역에 투자한 기업의 이름을 따 '삼성로'와 '기아로'로 바꾸기로 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과 삼성광주전자가 각각 이 지역 총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지역경제에 대한 공헌도가 높아진 데 보답하는 차원이다. 실제 삼성은 지난해 경기 수원공장의 세탁기와 에어컨 등 백색가전 라인을 광주로 완전 이전했다. 대규모 생산라인은 지방으로 이전하는 대신 수도권에는 연구·개발(R&D) 기능을 확충한다는 게 삼성의 복안이다. 광주시 관계자는 "광주가 세계적인 생활가전 집적지로 커나갈 계기이자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던 지역경제가 새롭게 도약할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미시는 지역 경제의 버팀목인 LG와의 협력을 통해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구미공단 노쇠화 문제를 LG전자 등의 신규 투자를 바탕으로 극복해나간다는 구상이다. 비록 LG필립스LCD가 경기 파주에 아시아 최대의 LCD단지를 만들기로 했지만 LG전자가 올해 완공을 목표로 PDP 신공장을 이 지역에 짓고 있는 등 LG그룹의 신규 투자가 이어지면 도시 전체의 구조 고도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