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집장수'된 국민들 ‥ 조헌제 <대한송유관공사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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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헌제 대한송유관공사 CEO chohj@dopco.co.kr >
가을이다. 문득 서울로 처음 이사하던 때가 떠오른다. 옛날에는 소위 '이사철'이란 게 있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사하기에 편리한 계절을 고르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말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시도 때도 없이 이사를 한다. 돈을 더 많이 얹어 받을 수만 있다면 아무 미련없이 집을 옮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집'은 더이상 주거공간만이 아니다. 부의 축적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 커졌다. '얼마에 사서 얼마에 팔았는가'가 집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다. 누가 큰 이문을 남기고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네는 복도 많아…"하면서 부러워한다. 아무런 '가치'도 생산하지 않는 부동산 투기꾼들이 갈수록 넘쳐나는 것도 문제지만 어찌보면 온 국민이 아예 집장수로 나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1억원이던 아파트가 그새 3억원짜리가 돼있다. '살림하는 집'보다 '거래되는 집'이 더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부단히 집을 사고팔아 얻은 돈으로 더 큰 집을 사고,더 좋은 차를 사고,해외여행도 다니고 참 살기 좋아졌다. 그런데 아들 딸을 시집장가 보낼 때가 되자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시집장가간 자녀들이 찾아와 하소연을 한다. 맞벌이로 허리띠 졸라매고 몇 년 간 죽어라 모은 돈이 1억원인데,애초에 봐두었던 아파트를 사려니 2억원을 더 대출받아야 한단다. 이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꾸 치솟기만 하는 집값이 원망스럽다. 정부더러 특단의 대책을 내놓으라고 성화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집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것은 오래전에 집장수로 나선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집을 사고 팔면서 손쉽게 벌어들인 돈과 쉽게 번만큼 아까운 줄 모르고 신나게 써왔던 돈…. 그 돈은 결과적으로 아들,딸,손자들의 미래를 담보로 미리 당겨쓴 '빚'이었던 셈이다. 그 동안 쉴새없이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를 거둬간 국가와 지자체, 같은 물건을 놓고 거듭 알선비를 챙겨왔던 중개업자,그리고 비수기를 몰랐던 이삿짐센터만 돈을 벌었을 뿐,당사자들에게는 천만의 말씀이다.
30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시세나 세태에 신경쓰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한 집에 오래도록 정붙이고 살아가는 우둔함을 세상에 권하고 싶다. 투자상품이 아닌 '살림의 집'을 권하고 싶다. 당장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아들,딸,손자들을 실망시키거나 어렵게 해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