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崔炳鎰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정부와 여당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단독으로라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무리수를 쓰고 있다. 기업의 투자의욕을 저해한다는 여권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재벌개혁을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인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만, 정작 공정개래법 개정안의 독소조항은 다른 곳에 있다. 개정안은 금융계열사 보유주식의 의결권을 30%에서 15%로 축소하겠다고 한다. 재벌이 금융사 보유 주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고객의 돈으로 계열사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의결권을 제한해야겠다는 게 그 명분이다. 이미 보험업법 자산운용업법 등 관련 금융업법에서 이러한 우려를 반영해 규제하고 있는데 굳이 이중규제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반대는 차치하고라도, 의결권 축소는 심각한 역작용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의결권 축소는 많은 한국기업들이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쉽게 노출되는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적대적 M&A 활성화 자체는 기업 경영에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기존 경영진의 부실경영으로 기업의 잠재가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을 경우 적대적 M&A는 주주가치를 증대시킨다. 새 경영진은 가혹한 구조조정으로 생산성 증가에 기여하지 못하는 인력을 과감하게 줄이고,생산규모를 축소하고,심지어는 특정지역에서 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대적 M&A에서 증대되는 주주가치는 기업의 다른 중요한 이해당사자인 근로자, 지역사회의 희생 위에 가능하다는 것은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의 부실처리 과정에서 이미 목격했다. 그나마 이 경우에는 다른 뾰족한 대안들이 없기 때문에 부실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할 수 있지만,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으로 더욱 손쉬워 질 적대적 M&A는 부실경영과 무관한 한국의 우량기업들이 사냥감이 된다는 것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를 상정해 보자. 현재 외국인이 삼성전자 주식의 60%를 보유하고 있는 데 만약 특정 외국투자자가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가져가기 위해 적대적 M&A를 시도한다면, 삼성 금융계열사인 삼성생명이나 증권,화재 등이 보유하고 있는 9.1%에 불과한 주식으로, 게다가 의결권이 15%로 제약돼 버린다면 그 결과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재벌들이 계열사 지분을 왜 적게 보유해 경영권이 위협받는 상황까지 갔느냐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외환위기 와중에서 정부가 기업의 부채비율을 2백%로 낮추라고 하고 시한까지 정해서 압박하니 기업들은 유상증자가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그룹의 지분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금융계열사 의결권이 제한되면 경영권이 넘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영간섭이 늘어나게 된다. 그간 외국자본의 행태를 볼 때, 외국자본은 1대 혹은 2대 주주 지위를 확보한 후 구조조정과 배당정책에 개입해 투자원금을 조기 회수하려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글로벌 한국기업을 탄생시킨 공격적 혁신적인 경영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의결권 제한의 취지가 고객 자금을 이용한 타회사에 대한 지배력 행사를 금지하는 것이라면 외국계 금융회사에 대해서도 동일한 규제를 적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외국계 금융회사가 주식을 소유할 경우 공정거래법의 규제를 받지 않으므로 국내 금융회사만 차별적인 규제를 받고 있다. 의결권 제한은 외국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진국에선 국내기업 보호를 위해 외국자본에 대해 의결권에 차별을 두고 있다. 금융계열사 의결권 30%라는 현실은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적대적 M&A를 지나치게 활성화시켜 국내 우량기업마저 외국자본의 손쉬운 사냥감이 될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2002년 정부가 기업에 마련해 준 방패이다. 기업들이 이 방패를 마구 휘둘러 부실경영이 심각하고 국민경제에 무지막지한 폐해를 주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제도 시행 몇 년도 되지 않아 폐기해야 한다면 이는 경제정의를 가장한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말로만 기업에 투자 및 고용확대를 요구하면서 행동은 거꾸로 가는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훗날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byc@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