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1986년 이후 18년째 추진해 온 원전센터 건립계획이 부지선정 단계에서 또다시 무산 위기에 빠지면서 국내 에너지공급체계에 큰 위기가 예고되고 있다. 일부 환경단체들의 맹렬한 반대와 정치권의 눈치보기가 "원전 위기"의 1차적 원인이지만,국내 에너지공급에서 원자력발전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정부의 대(對)국민 설득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미흡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전력생산 40%' 지난해 국내 총 발전량 가운데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38.9%)보다 1.3%포인트 상승한 40.2%로 집계됐다. 지난 80년 전체 발전량의 9.4%에 그쳤던 원자력 발전은 국내 최대의 전력 공급원으로 자리를 굳혔다. 반면 석유를 이용한 발전량 비중은 지난 80년 78.8%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 추세를 지속,작년에는 8.2%로 한 자리수까지 떨어졌다. 국제 유가가 올들어 배럴당 10달러 이상 치솟았음에도 물 쓰듯 사용하는 전기요금이 출렁이지 않는 이유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원전의 공급 비중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전력 1kWh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발전원가는 원전이 39.75원으로 중유(75.05원)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한 방울의 석유도 나지 않는 자원 빈국인 한국이 해마다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해낼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해법은 원전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2008년부터 폐기물 포화 문제는 원전 발전 후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원전 폐기물의 처리다. 1백만㎾급 발전소 하나를 가동할 경우 매년 25t 규모의 폐기물(사용후 핵연료 기준)이 발생한다. 그러나 폐기물을 처리할 원전센터 건립 지연으로 현재 운영 중인 19기의 원자력발전소는 발전소별로 폐기물을 임시 저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저장량이 조만간 포화상태에 달할 것으로 예상돼 정부는 원전센터 건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서둘러왔다. 원전 생산을 맡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각 발전소별 사용후 연료 저장량은 작년 말 현재 6천5백88t으로 총 저장용량의 67.2%에 이르렀다. 또 발전소에서 사용된 옷과 장갑 등 중·저준위 수거물은 6만1천5백63드럼(2백ℓ 기준)으로 67.6%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원전별로는 울진원전의 중·저준위 폐기물 임시 저장고가 오는 2008년이면 완전 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월성은 2009년,영광과 고리는 각각 2011년과 2014년에 저장 용량이 바닥을 드러낼 전망이다. 한수원 관계자는 "임시방편으로 저장고의 용량을 늘리고 추가 저장고를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며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원전 가동률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경우 심각한 전력수급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전력난' 남의 일 아니다 전문가들은 원전센터 건립 차질로 인한 원전 가동 중단 위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원전 가동이 중단되면 지난해 상하이 등 18개 지역에서 총 14만회의 정전이 발생한 중국의 전력난 사태가 한국에서도 현실화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종경 한양대 원자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현재와 같은 고유가 시대에 국가 에너지 수급에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상당부분 원전 덕분"이라며 "원전센터 건립이 계속 지연될 경우 국가 에너지 수급체계 전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창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시민단체 등 반대여론에 휘몰려 원전센터와 신규 원전 건설이 지연될 경우 당장 7~8년 후에 심각한 전력난이 닥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