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을 둘러멘 비구니 스님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산문(山門)에 들어선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운동화를 신은 걸음걸이가 힘차다.


일주문을 지나 1.2 의 비포장길을 걷는 동안 옆조차 보지 않는다.


불영계곡의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스님은 무슨 생각에 잠겨 이 길을 가는 것일까.


스님은 경주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출가한 지 12년,그 중 6년을 선방에서 보냈다면서도 "아직 법랍(法臘)을 헤아리기 민망한 초보자"라며 스스로를 낮춘다.


하지만 깨달음을 향한 원력은 크기만 하다.


경주 금련선원에서 하안거를 했던 그는 해제한 지 불과 보름만에 다시 선원을 찾았다.


음력 8월 초하루에 시작하는 '산철결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산철결제란 다음 안거 때까지의 해제 기간에도 정진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선원의 형편에 따라 운영하는 것으로 보통 45∼60일가량 계속된다.


석달간의 휴식마저 반납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스님이 찾아간 곳은 경북 울진의 불영사 천축선원(天竺禪院).스님이 종무소에 문의하자 불영사의 소임자가 "짐은 누각에서 찾으시고,지대방에서 방부(房付)를 들이세요"라며 안내해 준다.


짧았던 자유를 다시 반납하고 '문 없는 문의 빗장'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스님의 표정이 결연하다.


"불영사는 1년 내내 결제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름 겨울 안거 외에도 산철결제를 두 차례 하니까 1년 중 열 달은 쉼없이 정진하는 셈이지요.


선원은 수행자를 위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불영사 주지 일운(一耘·52) 스님의 말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불영사는 장구한 역사 속에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면서도 선원의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수행터다.


일제 말기 대처승들의 사찰 운영과 한국전쟁 등으로 초라하게 퇴락했던 적도 있지만 지난 66년 이곳 선원장 일휴(一休·76) 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재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난 78년 '천축선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비구니 선원으로 출범했고 96년에는 일운 스님이 대웅전 동편에 54평 규모로 선원과 같은 규모의 별채를 신축,총림에 버금가는 수행 도량의 면모를 갖췄다.


"안거 때면 대개 50명 안팎의 수행자들이 모입니다.


사방 백리를 가봐도 산과 바다뿐인 첩첩산중이라 수행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요.


이번 여름엔 47명이 큰방에서 정진했어요.


안거 기간에는 선방 스님들뿐만 아니라 행자를 포함해 산문 안의 모든 대중들이 다 참선하기 때문에 안거 대중이 80명쯤 됩니다."


지난 14일부터 45일 일정으로 시작한 이번 산철결제 참가자는 40명.천축선원에서 계속 정진해온 20명 외에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찾아온 수행자들이다.


등을 맞댄 채 면벽한 스님들이 두 줄로 길게 앉아 있는 54평 규모의 선방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묵(寂默)하다.


"천축선원은 수행 가풍이 엄격합니다.


안거 때에는 하루 14시간 이상 정진하고 산철결제는 좀 여유있게 공부하도록 하루 8시간 정진하지만 대중들이 지켜야 할 청규(淸規)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일체의 외출과 통신은 금지됩니다.


산문 밖으로 한발이라도 나가면 즉시 퇴방이지요."


정진을 위해선 모든 생각과 망념을 다 내려놓으라는 얘기다.


선방 내에선 일체 묵언이다.


선원 바로 옆에 별채로 만들어놓은 지대방(휴식공간)에서도 취침 시간 외에는 누울 수 없고 잡담도 큰소리로 할 수 없다.


선원 담장 밖으로 목소리가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한다.


일운 스님이 문득 "가장 아름다운 날,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인 줄 아느냐"고 묻더니 "바로 오늘,지금 이 순간"이라고 일러준다.


지금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지옥과 극락이 갈라진다는 것.중국의 혜능 선사가 '육조단경'에서 '莫思向前 常思於後(막사향전 상사어후·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지금 여기에서 자기의 할 일을 생각하라)'라고 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지금 이 순간 일념(一念)을 챙기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한 생각에 생사와 과거,현재,미래의 삼계(三界)가 다 들어 있거든요.


그래서 산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숨 쉬는 것,밥 먹는 것,잠 자는 것 모두를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면서 생활하지요."


일운 스님은 그래서 "산문 안의 삶 자체가 수행"이라고 설명한다.


선방을 늘 열어놓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절에서는 먹는 것,입는 것에 욕심내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마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기 때문이다.


"숨을 쉴 땐 길고 깊게,그러면서 세밀하고 균일하게 해보세요.


밥을 먹을 땐 오래 씹으면 마음도 몸도 여유롭고 편해집니다.


돈 들여서 운동하는 대신 하루 3백번씩만 절을 해보세요.


잔병이 없어지고 성품도 겸손해집니다."


일운 스님은 왜 모든 강물,시냇물이 바다로 모여드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스님이 던지는 답이 허를 찌른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란다.


산문을 나서는데,그 낮은 바다로 향하는 불영계곡의 물소리가 호호탕탕(浩浩蕩蕩) 시원하다.


울진=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