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日엔 넘치고 한국엔 없는 '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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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星來 외대 교수ㆍ과학사 >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국회 밖에 생긴단다.
동학에서 친일 진상,그리고 광복후의 몇가지까지 폭넓은 연구가 시작될 모양이다.이 조사에서 당장 걱정스런 문제는 한국에는 자료가 태부족이고 일본에는 자료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특히 최근 1세기동안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꼴이다. 살기가 너무 바빴고 또 험악한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살기도 빠듯했고 살만한 사람들은 정당치 못한 짓거리로 그 지위를 누렸으니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고 일기나 기록을 남기겠는가.
한국의 현대가 격동의 연속이어서 기록이 절대 부족한 것과는 달리 일본의 근대화는 비교적 순탄했고 자연히 기록도 한우충동(汗牛充棟)이다.
싣게 되면 소가 땀을 흘리고,쌓으면 대들보까지 차오를 만큼 기록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니 국내 사료의 절대 부족도 조사를 어렵게 하겠지만 너무 많은 일본측 사료도 만만치 않은 문젯거리라는 걱정이다.
그리고 당장 떠오른 경우 하나가 오래전에 읽었던 '원경일기(原敬日記)'다.
과거사 가운데 친일문제 조사라면 당연히 이런 책도 읽어야 할 터이니 말이다.
원경(하라 다카시,1856∼1921)은 1919년 우리의 3·1 기미 독립운동때 일본총리이다.
그는 19세부터 65세 죽을 때까지 일기를 썼고 그것이 지금 10여권 인쇄돼 있다.
기미 독립운동에 대한 외국반응을 조사하다가 그 방대한 내용 가운데 1919년 전후만 훑어본 일이 있다.
그렇게 그에 대한 관심이 생긴 상태에서 10여년전 일본 여행중 뜻밖의 경험도 하게 됐다.
신칸센의 북쪽 종점 모리오카역에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안내소에서 그 곳이 그의 고향이며 기념관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 기념관에서 그가 민비(명성황후로 추존) 시해 직후 사건수습을 위해 공사로 서울에 부임했으며 그곳에 적어도 한점 이상의 대원군의 파초그림이 있음도 알게 됐다.
1919년을 전후해 몇차례나 그는 매국노로 유명한 송병준(1858∼1925)을 만난 기록도 '일기'에 있다.
친일문제 조사에는 당연히 원경일기 내용도 잘 살피지 않을 수 없겠다.
원경은 한창 제도적 민주화가 실현되던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역사에서 소위 '대정(大正)민주주의'를 대표한다.
그는 최초의 공작 백작 등 작위가 없는 총리였기 때문에 '평민총리'란 애칭을 얻었다. 그는 인상적인 유서 4통을 남겼다.죽은 후 일체의 추존(追尊)을 사양한다고 밝혔다.
또 하나만 즉시 개봉하도록 겉에 써놓았는데 이에는 자신의 죽음을 친척 이외에 알리지 말고 신문에 간단한 공고만 내도록 아들에게 지시했다.
물론 조화도 부의도 모두 사양했고 또 총리이면서도 도쿄에서 일체의 추모행사를 금하고 즉시 고향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기념관이 고향집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 같다.
원경은 일본 동북부의 별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다.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고 15세에 상경해 고학을 하며 영어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20세에 그는 정부가 세운 법률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프랑스 교수가 프랑스어 책으로 강의를 했다.
영어를 배운 그가 이번엔 불어도 배우게 됐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오랜 관리생활을 거쳐 정치가로 변신,여러 차례 대신(장관)자리를 거쳐 1918년 9월 총리가 된다.
우리나라 기미 독립운동은 그가 총리에 오른지 반년 후의 일이었다.
총리가 된지 3년 남짓 1921년 11월 4일 도쿄역 구내에서 원경은 18세 철도원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우익의 음모설 등이 무성할 뿐 사건은 흐지부지됐고 종신형을 받은 암살범은 세번의 감형 끝에 13년 뒤 석방된다.
원경일기는 어쩌면 사소한 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당시 일본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록이 남아 있고 그 상당 부분이 식민지 조선인과 관련된다.
그 많은 기록 때문에도 우리의 친일 진상규명은 심히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제발 일기와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다.
또 대통령의 기념관도 고향 태어난 집에 자그맣게 만들고.앞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수백명 아니 수천명 나와야 할 것 아닌가?
그 많은 대통령이 모두 거대한 기념관을 짓기로 든다면 국토가 좁아질 것이니.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국회 밖에 생긴단다.
동학에서 친일 진상,그리고 광복후의 몇가지까지 폭넓은 연구가 시작될 모양이다.이 조사에서 당장 걱정스런 문제는 한국에는 자료가 태부족이고 일본에는 자료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특히 최근 1세기동안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꼴이다. 살기가 너무 바빴고 또 험악한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살기도 빠듯했고 살만한 사람들은 정당치 못한 짓거리로 그 지위를 누렸으니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고 일기나 기록을 남기겠는가.
한국의 현대가 격동의 연속이어서 기록이 절대 부족한 것과는 달리 일본의 근대화는 비교적 순탄했고 자연히 기록도 한우충동(汗牛充棟)이다.
싣게 되면 소가 땀을 흘리고,쌓으면 대들보까지 차오를 만큼 기록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니 국내 사료의 절대 부족도 조사를 어렵게 하겠지만 너무 많은 일본측 사료도 만만치 않은 문젯거리라는 걱정이다.
그리고 당장 떠오른 경우 하나가 오래전에 읽었던 '원경일기(原敬日記)'다.
과거사 가운데 친일문제 조사라면 당연히 이런 책도 읽어야 할 터이니 말이다.
원경(하라 다카시,1856∼1921)은 1919년 우리의 3·1 기미 독립운동때 일본총리이다.
그는 19세부터 65세 죽을 때까지 일기를 썼고 그것이 지금 10여권 인쇄돼 있다.
기미 독립운동에 대한 외국반응을 조사하다가 그 방대한 내용 가운데 1919년 전후만 훑어본 일이 있다.
그렇게 그에 대한 관심이 생긴 상태에서 10여년전 일본 여행중 뜻밖의 경험도 하게 됐다.
신칸센의 북쪽 종점 모리오카역에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안내소에서 그 곳이 그의 고향이며 기념관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 기념관에서 그가 민비(명성황후로 추존) 시해 직후 사건수습을 위해 공사로 서울에 부임했으며 그곳에 적어도 한점 이상의 대원군의 파초그림이 있음도 알게 됐다.
1919년을 전후해 몇차례나 그는 매국노로 유명한 송병준(1858∼1925)을 만난 기록도 '일기'에 있다.
친일문제 조사에는 당연히 원경일기 내용도 잘 살피지 않을 수 없겠다.
원경은 한창 제도적 민주화가 실현되던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역사에서 소위 '대정(大正)민주주의'를 대표한다.
그는 최초의 공작 백작 등 작위가 없는 총리였기 때문에 '평민총리'란 애칭을 얻었다. 그는 인상적인 유서 4통을 남겼다.죽은 후 일체의 추존(追尊)을 사양한다고 밝혔다.
또 하나만 즉시 개봉하도록 겉에 써놓았는데 이에는 자신의 죽음을 친척 이외에 알리지 말고 신문에 간단한 공고만 내도록 아들에게 지시했다.
물론 조화도 부의도 모두 사양했고 또 총리이면서도 도쿄에서 일체의 추모행사를 금하고 즉시 고향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기념관이 고향집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 같다.
원경은 일본 동북부의 별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다.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고 15세에 상경해 고학을 하며 영어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20세에 그는 정부가 세운 법률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프랑스 교수가 프랑스어 책으로 강의를 했다.
영어를 배운 그가 이번엔 불어도 배우게 됐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오랜 관리생활을 거쳐 정치가로 변신,여러 차례 대신(장관)자리를 거쳐 1918년 9월 총리가 된다.
우리나라 기미 독립운동은 그가 총리에 오른지 반년 후의 일이었다.
총리가 된지 3년 남짓 1921년 11월 4일 도쿄역 구내에서 원경은 18세 철도원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우익의 음모설 등이 무성할 뿐 사건은 흐지부지됐고 종신형을 받은 암살범은 세번의 감형 끝에 13년 뒤 석방된다.
원경일기는 어쩌면 사소한 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당시 일본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록이 남아 있고 그 상당 부분이 식민지 조선인과 관련된다.
그 많은 기록 때문에도 우리의 친일 진상규명은 심히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제발 일기와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다.
또 대통령의 기념관도 고향 태어난 집에 자그맣게 만들고.앞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수백명 아니 수천명 나와야 할 것 아닌가?
그 많은 대통령이 모두 거대한 기념관을 짓기로 든다면 국토가 좁아질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