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04:38
수정2006.04.02 04:41
1일 로우쉬 샤웨이즈 쿠르드족 통합의회 의장과 함께 이라크임시정부 부통령으로 뽑힌 이브라힘 알-자파리(56)는 시아파 계열인 다와당 지도자로 대중적 지지기반이 넓은 인물이다.
AP 통신에 따르면 파이낸셜 타임스의 최근 여론조사에선 이라크 시아파 최고 지도자인 알리 알-시스타니와 반미저항 투쟁을 주도해 온 시아파 젊은 지도자 무크타다 알-사드르에 이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라크 지도자 반열 3위에 올랐다.
자파리가 이끄는 다와당은 사드르의 삼촌인 모함메드 바크르 알-사드르가 1950년대 창건한 정당으로, 이슬람 개혁과 종교제도 현대화를 기치로 내걸고 있다.
이슬람 창건자인 무함마드의 손자인 이맘 후세인의 시신이 묻힌 시아파 성지 카르발라에서 태어난 자파리는 모술대학을 졸업하고 1966년 다와당에 들어갔다.
그는 이름철자 순서에 따라 과도통치위원회(IGC) 초대 순번제 의장을 지냈다.
후임 IGC 의장들이나 다른 해외파 IGC 위원들에 비해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그가 한때 망명생활을 한 이란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부패를저질렀다는 의혹과 함께 여성권리를 억압하는 이슬람 보수주의자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지난 2월 이라크 기본법 초안을 만들때 자파리는 이슬람을 모든 이라크법률의 토대가 되는 유일한 법원(法源)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는 이란과 같은 신정(神政) 국가를 지지하지는 않고 있다.
또 미 군정이 구성한 IGC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다와당을 이라크 정치세력의 주류로 자리매김토록 하는 수완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지난 4월엔 미군과 사드르측간의 나자프 무력대치와 관련,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테헤란을 방문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한층 높였다.
다와당은 자파리가 이란으로 망명했다 영국으로 건너간 시기인 지난 80년대 이라크 집권 바트당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1981년의 주 베이루트 이라크 대사관 공격은 유명하다.
이 때문에 다와당에 대한 후세인 정권의 탄압은 극심했고, 1982년부터 1984년사이에만 후세인 정권에 의해 7만7천여명의 당원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다와당측의 주장이다.
이처럼 후세인 반대세력으로 지속적인 투쟁을 벌인 것이 결과적으로 다와당과자파리가 이라크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요인이 됐다.
자파리는 미군이 지난해 3월 이라크를 침공한 뒤 발빠르게 당 재건 작업에 나서이라크 남부에서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첫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다와당은 전쟁후의 반후세인, 반미 분위기에 편승함으로써 후세인 정권 시절의 지하당 조직에서정치 주류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고, 자파리의 위상은 그만큼 확고해졌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