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03:34
수정2006.04.02 03:38
상생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 화두로 떠오르는 모양이다.
지난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상생의 정치를 위한 기본틀을 마련하자"는 협약을 발표한 것도 앞으로의 정치를 '제로섬'보다는 '포지티브섬'으로 접근해 나가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상생의 정치'에 대한 아전인수식 해석이나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생의 정신은 여야가 저급한 방식으로 사소한 문제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지, 국정에 대한 무비판과 무견제의 정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정치는 평화나 화합보다는 긴장과 갈등을 제도화하는 정치다.
삼권분립 혹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해서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간에 대립과 갈등을 정당화하는 이유도 권력의 독점이나 독선적 국정운영이 초래할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확실히 긴장과 갈등은 국력의 낭비일 수 있고 국정의 비효율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이나 오만한 정치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여야관계에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야당은 정부의 정책이나 여당의 의제설정이 잘못됐다고 판단할 때 과감하게 그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해야 한다.
어차피 민주사회에서 야당의 역할과 임무란 정부 여당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지 맞장구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국정에서 큰소리가 날까봐 '쓴소리'를 하지 않는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부엌에서 필요없는 것처럼, 민주정치에서 비판하지 않는 야당은 있으나마나한 야당이다.
문제는 건설적인 비판인가 하는 점이지 무비판이 핵심은 아니다.
'상생의 정치'가 비전도 똑같고 견해도 똑같은 '획일성의 정치' '쌍둥이 정당'을 주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집권여당이 하고 있는 일 가운데 비판이나 비난받을 만한 일은 없는가.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여당에 과반의석을 줘 책임여당을 만들어 준 데는 여러 가지 기대와 소망이 들어있다.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이 경제살리기와 민생챙기기이다.여야가 정치자금 문제로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와중에서 경제와 민생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사람들은 이에 넌더리를 냈고 총선이 끝나면 투자와 소비심리도,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 기대가 지금 어느정도 충족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유감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 게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즈음은 위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엊그제는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또 환율은 급등하며 외평채 값은 급락하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처럼 이제 우리에게 '잃어버린 세월'이 시작된 것일까.
'잃어버린 세월'은 '잃어버린 세대'를 낳게 마련이다.
정부 여당은 무얼 하는가.
느긋하게 승리를 만끽하면서 누구를 총리 시키며 누구를 입각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또 끝없이 개혁만 외치고 있다. 영원한 개혁'만 외치는 과반의석인 여당의 경직된 모습은 정말 보기가 민망하다.개혁 이외에 국정의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왜 이렇게 외곬으로 나가는가.정치는 외곬의 신념과 밀어붙이기식 오기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일찍이 갈파했다."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지만 죽으면 굳어지게 마련이다.
정치란 것도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부드러우면 '삶의 정치'이고 굳으면 '죽음의 정치'가 아니겠는가.
지금 여당이 과반의석을 얻었다고 온 천하를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며 일방적으로 국정의 아젠다를 정하는 것은 '경직된 정치'일지언정 결코 '부드러운 정치'도,'상생의 정치'도 아니다.
국정을 책임진 정당의 자세도 아니다.
경직된 것은 꺾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헌정사는 입증하고 있다.
부디 여당이 겸손한 마음으로 국정의 진수인 경제를 챙기길 간곡히 권고한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