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며 올해 통상정책을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이다. 동북아 중심국가건설에서 시작해 APEC, 'ASEAN+3' 등의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슬로건이 난무했지만 제대로 풀린 것이 거의 없다. 한?칠레 FTA도 29일 국회비준이 무산돼 오리무중이다. 정부로서는 농민단체의 반발, 국회의 발목잡기 등 나름대로 핑계가 있었겠지만 해를 바꾼다고 국내외 통상환경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첫째 내년에는 금년보다 더 큰 이익집단간의 갈등이 우려된다. 우선 2004년에 마무리지어야 하는 미국 중국 등 쌀 수출국과의 쌀개방 협상이다.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든 관세화를 하든 이제 쌀시장개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일부 포도농가의 피해 때문에 한·칠레 FTA 비준을 놓고 벌인 정치적 소동을 생각할 때 주식(主食)인 쌀개방에 대한 농민단체들의 메가톤급 반발은 불 보듯 뻔하다. 설상가상으로 내년부터 한·일 FTA의 정부간 협상이 시작되면 피해를 볼 노동계 중소업계까지 크게 동요할 것이다. 둘째, 더욱 거세질 미국과 중국의 통상공세이다. 내수부진 속에서 한국경제를 그나마 지탱해 준 것이 수출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내년도 우리나라 통상의 아킬레스건이다. 사상 최대 무역적자 부담을 안고 내년에 재선을 치러야 하는 부시 행정부는 한국 같은 대미흑자국에 대한 환률조작국 공세를 강화할 것이다. 또한 30일 방한하는 미 정부대표단과 협의를 지켜봐야겠지만 광우병으로 인한 쇠고기 금수는 한·미간 새로운 통상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한편 눈덩이처럼 불어나 작년 60억달러의 두 배에 이를 1백3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보게 될 중국도 거칠게 한국을 몰아칠 것이다. 특히 공산품 적자를 농산물 수출로 메우고자 하는 이들 두 나라는 쌀 같은 농산물시장 개방 압력의 고삐를 더욱 바싹 조일 것이다. 셋째, 점점 허상이 드러날 동북아 경제중심 정책이다. 정부는 화려한 백화점식 정책발표로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국민에게 뭔가 가시적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현실은 반대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동북아정책의 성패를 가름할 가장 좋은 지표인 외국인 투자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새해에는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선 대통령부터 냉엄한 국제경쟁을 인식하고 2만달러 시대를 향한 새로운 통상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개방에 대한 이해집단의 반발을 달변과 달콤한 보상책으로 구슬리거나 정치 탓만 해선 안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수출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상대국도 우리에게 상품을 팔 기회를 줘야한다'는 가장 간단한 자유무역의 원칙을 강력한 국정 아젠다로 제시해야 한다. 또한 농업이건 제조업이건 구조조정은 미국의 압력이나 FTA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고쳐야 한다. 중국 같은 강력한 경쟁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끊임없는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다음으로 너무 들뜬 동북아 열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아무리 중국경제가 빠르게 부상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이라는 거대한 경제권을 소흘하게 다뤄선 안 된다. 중국경제의 도약 뒤에는 미국경제의 역할이 있다. 작년 미국의 대중적자가 1천3백억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미국이 시장을 개방하기에 중국의 고도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제라도 두 나라간의 관계가 냉각되면 중화경제도 뜬구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동북아 구상 중에서 현실성 없는 정책을 선별적으로 정리하고, 미국 유럽과의 적극적 통상외교를 펼쳐야 한다. 특히 내년부터 동구권까지 확대될 EU 진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은 통상정책을 펼쳐도 우리기업의 내부역량이 못 따라주면 소용이 없다. 설비투자 위축이 눈 앞에 다가선 세계경제 호황을 향유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기업의 투자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정책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