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붉은 돼지'가 오는 19일 개봉된다. 지난 92년 제작된 이 작품은 그 해 일본 흥행랭킹 1위(3백만명)에 올랐고 이듬해 앙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며 미야자키 감독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붉은 돼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지중해 연안을 배경으로 공적(空敵·하늘해적)을 퇴치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돼지 파일럿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 중 최고의 전투조종사였지만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로 변한 주인공의 심경에는 잔혹한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의 세상과 절연을 시도하고픈 바람이 담겨 있다. 유폐된 생활을 영위하는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조차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다. 이 영화는 돼지와 인간이 동등한 인격체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세계대전 후 등장한 '인간중심주의의 해체'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흉측한 몰골의 돼지가 잘생긴 인간 연적(戀敵)들을 물리치고 두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얻는다는 설정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라'는 교훈을 말해준다. 창공을 나는 돼지는 전쟁 중 잃어버린 자유와 자긍심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가치에 대한 연모와 동경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붉은 돼지'와 여인들의 관계에는 육체의 욕망은 없고 사랑의 순수성만 남아 있는 게 그 증거다. 주인공 '붉은 돼지'는 여인들의 이상과 동경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작품 속의 에피소드는 다이내믹하지만 파괴적이 아니다. 감독은 목숨을 건 연적과의 전투신에서도 살육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화면에는 눈부신 풍경과 평화를 누리는 인간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