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다] 대현 신현균 회장 (2) 사재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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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회장은 "재산을 모두 내놓겠다"며 "공적자금 지원 같은 어떤 도움도 필요 없으니 회사채만 연장해 달라"고 채권은행에 호소했다.
신 회장의 확신에 찬 모습을 지켜보던 채권은행들은 자체 조사를 거쳐 마침내 워크아웃에 동의하게 된다.
채권상환기한을 3년간 유예하면서 일부를 3년 후 주식으로 전환하고 금리를 19%에서 13%로 내려주는 조건이었다.
템플턴측이 이자 인하에 반대하는 바람에 협상이 한때 장벽에 부닥치기도 했으나 주식전환가격을 9천3백원에서 6천3백원으로 내리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대현은 그렇게 유동성 위기를 넘겼다.
"당시 워크아웃에 성공적으로 들어간 기업은 거의 없었습니다.그나마도 수출·기간산업 위주로 지원해 주는 분위기였죠.신한은행장은 우리 회사의 속사정을 알아보고 워크아웃은 대현 같은 기업이 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신 회장은 은행과의 약속대로 사재를 모두 내놓았다.
먼저 논현동 사옥을 처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유동부채를 1백30억원 이상 줄일 수 있었다.
분당빌딩과 선산,골프회원권,유가증권,각 지역 매장 등도 모두 내놓았다.
"어차피 회사 때문에 축적된 재산이기에 다시 회사에 돌려 준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고비를 넘겨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죠."
신 회장의 사재 '올인작전'은 대현의 부채비율을 낮추고 경영정상화를 이루는 데 커다란 디딤돌이 됐다.
차라리 부도를 내면 개인 재산은 건질 수 있지 않느냐는 유혹도 있었지만 신 회장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대현은 신 회장이 23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분신'이었다.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고 대학등록금을 밑천으로 사업을 시작,고생끝에 실크날염에 성공해 이화여대 앞 등의 양품점에 납품하던 일.
잘 나가던 날염실크 원단 사업이 하루 아침에 경쟁사에 밀려 재고를 끌어 안고 느꼈던 좌절감.
프랑스 패션쇼를 처음 보는 순간 "이게 바로 패션이구나"라며 자극받아 명동에 '페페' 매장을 내고 다시 뛰었던 일 등을 생각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회사였다.
은행측은 워크아웃의 또 다른 조건으로 신 회장이 경영을 맡아 줄 것을 요구했다.
워크아웃 기업의 사주가 물러나고 은행관리인이 경영을 맡는 관례를 깬 특이한 요청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건강이 나빠져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무조건 쉬라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몸을 돌볼 때가 아니었다.
채권은행측은 신 회장을 보조할 수 있는 워크아웃 단장(김현수씨)만을 파견했다.
2000년 1월1일.
대표이사로 취임한 신 회장은 직원들에게 새로운 경영방침을 제시하게 된다.
"저는 현장 실무자의 자세로 일하겠습니다.여러분은 최고경영자의 책임감으로 일해 주기 바랍니다."
신 회장은 업무에 몰두하기 위해 개인적인 대외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리고 회사가 쓰러질 수밖에 없게 만든 환부를 파헤치며 대수술을 준비했다.
최규술 기자 kyus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