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손열호 <동양석판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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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사를 대만정부 물자국의 석판 입찰에 초청하오니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류에는 대만 정부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기회가 왔다. 이제는 직접 수출을 해보자."
즉시 무역부에 입찰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외무부에 비자를 신청했다.
돌이켜 보니 아무 것도 모르고 석판 생산에 뛰어든지 꼭 13년만의 일이었다.
석판은 얇은 강판에 인체에 무해한 주석을 입힌 제품으로 통조림을 비롯한 식품용기, 페인트통 등의 원자재로 다양하게 쓰이는 기술집약적 제품이다.
1959년 7월, 주변 사람의 권유로 서울 영등포 당산동에 있는 공장 하나를 인수했다.
비만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진흙탕이 질척거리는 곳이었다.
허름한 공장을 인수한 이유는 단 한 가지.
"통조림 깡통의 원판이 되는 그 좋은 석판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1940년대 초부터 헌 발동기 같은 기계를 모아 일본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
전쟁 중이라 물자가 아주 귀한 때였다.
그래서 일본에 가져가 수리를 해서 팔면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운송이 불가능해지자 이 일을 중단해야 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 남대문로에 '신라양행'이라는 가게를 차려놓고 농기구 장사를 했다.
주변에는 허주열 회장이 경영하는 대원강업과 대한철강상공사 등 쇠를 원료로 하는 공장들이 성업하였다.
그런데 나이 사십이 다 되어 시작한 석판 사업이 덜컥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수한 당산동 공장의 기계들이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였던 것이다.
공장 중매인이나 공장을 인수한 나나 석판사업에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석판 제조에 '깡통'이었으니 생겨난 불상사라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일본을 드나들며 기술을 익히는 방도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기계를 직접 설치하여 1962년 9월에야 겨우 석판을 생산하게 되었다.
자금도 자금이려니와 최초의 국산 석판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공들인 노력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인생의 전부를 국산 석판 제조에 매달렸다.
그땐 자주 "깡통을 만들다 깡통 차면 되지 뭐"라는 말을 뇌까렸다.
산고 끝에 석판을 생산하기 시작한지 10년, 드디어 우리의 석판이 해외로 진출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대만 정부의 입찰에 참가하기 전, 우리의 석판이 해외로 전혀 나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양석판은 국내 통조림업계의 내용물을 담아 세계시장으로 팔려나감으로써 간접수출의 역할을 했다.
이것은 직접수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초, 양송이가 수출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양송이는 서양음식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재료로 재배에 성공하자 전국적으로 재배 붐이 일 정도로 수출 주요 품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굴 양식이 성공하여 굴 통조림도 개발되었다.
굴 통조림의 공관은 제조 공정상의 기술적인 문제와 까다로운 품질조건 때문에 처음에는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그런데 양송이 통조림이 우리가 생산한 석판으로 만들어진 공관에 담겨져 수출되는데도 아무런 하자가 발생하지 않자 비로소 굴 통조림도 국산 공관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국산 석판으로 만들어진 공관에 담겨진 통조림이 세계 곳곳에서 호평을 받게 되자 대만이 석판 수입처를 우리나라로 돌려보려고 대만 물자국 명의의 입찰초청서를 우리 회사에 보내온 것이다.
나는 서둘러 대만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동안 알고 지내던 손건농이라는 철강재 무역상의 도움을 받아 입찰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 입찰이라는 것이 단시일 내에 진행되지 않았다.
식품용 용기이다 보니 각종 까다로운 규제사항을 통과해야 하고, 절차도 복잡했다.
당시는 어느 나라나 행정절차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아 절차를 밟는데도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
"낙찰자, 대한민국 동양석판!"
선진국들과의 치열한 정보전과 가격경쟁 끝에 드디어 우리 회사가 낙찰자로 결정되었다.
처녀 수출이 결정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2년 10월 처음으로 제품을 선적했다.
그 해에 수출한 물량은 3백82t.
가격으로는 9만8천5백84달러였다.
선적 직전에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불량품은 바다에 던져 버려라. 품질만이 국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982년 2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개설했다.
또한 기존의 동남아 시장 거래선과 유대를 강화하고 새로운 수요 창출에 노력을 기울였다.
수출신장에는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효성물산에 근무하며 해외시장 개척에 노력해온 현 손봉락 회장의 힘도 컸다.
수출에 주력한 결과 1982년 제19회 수출의 날에는 '1천만불 수출의 탑'을 받을 수 있었다.
1983년에는 1년 만에 수출물량이 두 배로 늘어나 '2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1년 만에 수출물량 2백% 달성을 기록한 것은 업계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기록적인 수출물량 증대에는 자체의 노력과 함께 우리나라 종합상사의 역할도 컸다.
현재 5대양 6대주로 팔려나가고 있는 수출의 본격적인 초석은 그 때 다져진 것이다.
나는 그 때의 경험을 살려 이야기하곤 한다.
"언제나 위기는 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동양 석판은 제품 수출에 주력하며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해외에 공장을 지어주는 플랜트 수출을 해보자는 목표를 일찌감치 세워놓고 있었다.
1998년 4월에는 미국 오하이오주에 연산 25만t 규모의 공장을 준공하여 "캔(can)의 나라"인 미국 전역에 우수한 석판을 공급하고 있다.
2002년 말 동양석판의 총 수출액은 7천만달러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 초 온통 진흙탕이었던 당시와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든다.
평생 '쇠'와 인연을 맺어온 나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공업화를 이룩한 것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장인정신의 맥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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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열호 명예회장 약력 ]
21년11월 경북 영주군 장수면 출생
45년9월 신라양행 설립
48년9월 삼양연마공업(주) 인수
57년5월 삼화연탄공업(주) 인수
59년7월 동양석판(주) 설립
64년4월 대한요업총협회 회장
92년4월 우석산업(주) 설립
94년4월 오하이오 코팅컴퍼니 설립
95년11월 (사)홍효사 이사장
2000년1월 동양석판(주)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