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블라인드테스트 해보자"..김광현 <산업부 생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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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자사 제품을 경쟁사 제품과 비교할 때 흔히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란 기법을 쓴다.
상품명 제조업체명을 가린 채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테스트는 선입관 없는 상태에서 시제품이나 제품의 우열을 가려보고 싶을 때 쓰인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엉뚱한 결과가 나오곤 한다.
개발팀에서 선호하는 시제품이 가장 나쁜 점수를 받을 때도 있다.
시장점유율에서 하위권을 맴도는 자사 제품의 선호도가 선두권 제품보다 높게 나오기도 한다.
이 경우 "품질은 우리 제품이 더 좋은데 소비자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푸념이 나오게 마련이다.
최근 만난 중견 화장품업체 임원도 그랬다.
이 임원은 "소비자들의 국산 역차별 때문에 우리 화장품업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며 "소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실제로 화장품업계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하위권 업체는 물론 선두권 업체들에도 비상이 걸렸다.
매출이 작년에 비해 적게는 20%,많게는 50%나 줄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 업체를 제외하곤 대부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이 바람에 한때 '빅3'를 넘봤던 한 업체는 최근 사장과 전무를 전격 교체했다.
야구단까지 운영하며 이름을 날렸던 다른 업체는 수도권 공장을 팔려고 내놓았다.
국내 업체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외국계 업체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10년전만 해도 외국산의 화장품 시장 점유율은 10%선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은 35%에 달한다.
백화점 점유율은 80% 이상이다.
국내 화장품업체들이 곤경에 처한 것은 외국 업체들 때문은 아니다.
불황으로 인해 다른 업종에서도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그러나 "국산 화장품이 역차별당하고 있어 블라인드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다"는 얘기엔 일리가 있다.
한때 홈쇼핑에서 국산 화장품의 2∼3배 가격에 불티나게 팔렸던 R 화장품이 단적인 예다.
한 소비자단체는 이 화장품이 포장만 외국에서 한 '국산'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수입업체가 반발,법정싸움이 벌어졌다.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국산이라고 했을 때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을까" 반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하나의 예로 거리 화장품가게,즉 전문점 시장을 들 수 있다.
수년 전만 해도 전문점은 국내 화장품업체들의 핵심 유통 채널로 외제 명품 화장품도 감히 넘보질 못할 정도의 '텃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외제가 매대의 25% 가량을 점령했다.
전문점에 깔린 외제 화장품은 명품이 아니다.
자국에서도 외면당하는 '싸구려'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런 화장품이 인기를 끄는 것은 국산에 비해 성능이 좋거나 싸기 때문이 아니다.
비싼 명품을 구입하지 못한 젊은 여성들이 이런 제품으로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제품으로 대리만족을 느껴야 할 정도로 외제가 좋을까.
물산장려운동을 펼치자는 얘기가 아니다.
외제라도 물건이 좋으면 사줘야 한다.
또 국산 쓰라고 떠들지 않아도 경쟁력이 있으면 언젠가는 쓰게 된다.
휴대폰이 그랬다.
그러나 화장품이나 패션상품 같은 사치품은 다르다.
외제라면 무조건 프리미엄을 얹어주는 심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제 한번쯤 따져볼 때가 됐다.
내수시장을 활짝 열어놓고 경쟁해야 하는 시대,제조업 공동화가 매우 염려스러운 지금 우린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많이 지불(pay too much)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k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