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며,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고 틱낫한 스님은 말한다. '화'를 다스리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화는 신체장기처럼 우리 몸의 일부여서 억지로 떼어낼 수 없으며,화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화를 아기와 같이 생각해 보듬고 달래야 한다고 강조한다. 화가 도지면 화병(火病)이 된다. 그 증상을 보면 사는게 재미없고 매사에 짜증이 난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고,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면서 몸이 화끈거린다. 화병은 서양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질병이다. 화병이 병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미국정신과협회는 지난 1996년 화병(HWAPYUNG)을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특이한 정신질병으로 공인했다. 화병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 채 안으로 삭이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한(恨)의 문화'가 이 병을 가져온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깊고 큰 한이 골수에 사무치면서 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남성의 외도와 시집살이 등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으로 주로 여성들이 앓았는데,지금은 남녀 구분 없이 성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환란 이후엔 감원 명예퇴직 등으로 직장이 흔들리면서 40∼50대 남성들이 화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성취욕이 좌절되면서 빚어지는 욕구불만도 이 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고유질병이면서도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과 구별이 어려웠던 '화병'에 대한 진단기준이 마련됐다는 소식이다. 경희의료원 화병클리닉과 고려대 안암병원 우울증센터에 입원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끝에 12개의 체크 리스트(가슴답답증,분한 감정 등)를 완성했다고 하는데,이 중 한 증상이라도 6개월 이상 계속되면 전문의와 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를 억제하는 것도,그렇다고 화를 발산하는 것도 화병의 원인이 된다. 화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최상의 치료방법일텐데 이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화가 치밀어 오르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는 나름대로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