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유년의 추석 .. 김형아 <하이에이치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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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아 < 하이에이치알 대표 hihrceo@hr.co.kr >
이제 며칠 뒤면 먹거리 풍성한 명절 추석이다.
집안의 3대독자이면서,당신 대에 이르러 딸만 여섯을 낳으신 아버지는 평소 여자아이라도 늘 당당하고 자유롭게 자라도록 지지해주셨던 반면,명절 때만 되면 어린 딸들에게 지나치리 만큼 엄격한 제사격식을 가르치셨다.
"그해 추수한 것 중 가장 탐스러운 햇과일들만을 골라 상에 올리되 순서는 진설자의 왼편으로부터 조율시이 순으로 하고 색깔은 홍동백서로 올리며,찬류는 좌포우혜하고,탕은 어동육서라." 끝없이 이어지는 예법에,우리 여섯은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건성으로 듣곤 했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추억하시며 그분들의 대단했던 기백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해주실 양이면,잠이 번쩍 깨면서 마치 그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일주일 전쯤부터 각종 김치를 담가 추석 때 먹기 좋을 만큼 익히고,전날에는 꼬치산적이니 누름적이니 하는 것들을 채반 하나가득 지져 처음엔 고소하다가도 나중엔 기름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매년 장만했던 음식을 동네어른들을 모셔 한상 정성껏 차려드리고 이집 저집 나누어 주시기도 했으나,여전히 손큰 어머니의 추석음식이 남아 집에서는 연일 손님들이 넘쳐났다.
지금 필자는 추석명절이 돌아오면 전날 백화점 지하의 떡 코너에서 줄을 선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복잡한 예법 강의와 산처럼 쌓인 송편반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편안함보다는 야박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씁쓸해진다.
그 때는 몰랐지만 이미 자라서 간혹 부딪치는 어려움에도 열정과 자신감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추억되는 조상님들을 통해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었던 까닭이 아닐까?
추석명절 때면 동네 전체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어머니는,지금 매순간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위치의 필자에게 자칫 각박해지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못할 때마다 한 순간의 여유와 호흡을 만들어 주신다.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음식을 만드실 기력도 없어 꾀피우며 백화점에서 추석 장을 봐오는 막내딸을 꾸짖지 않으신다.
이제 며칠 뒤면 다시 돌아오는 올 추석은 어머니의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왕만두같이 못생긴 송편이라도 정성껏 빚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