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시내를 관통하는 리피강 북쪽의 오코넬 가(街).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다니엘 오코넬의 이름을 딴 더블린 최대 번화가다. 지명의 유래에서 알수 있듯 이 거리에는 비운의 아일랜드 역사가 맞닿아 있다. 1916년 아일랜드 민중들이 영국 지배에 항거해 일으킨 '부활절 봉기'의 주무대였던 중앙우체국이 대로를 지키고 있고 군데군데 독립 영웅의 동상들은 슬픔과 한이 짙게 배어있는 이 나라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90년대의 눈부신 성장으로 '슬픈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영국 식민통치 시절 영국 해군의 영웅 넬슨 제독의 동상이 있던 자리는 아일랜드의 경제성장을 기념하는 최신식 첨탑 '더블린 스파이어'로 대체됐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지진아'로 멸시받았던 아일랜드. 이 나라가 이처럼 초고속 성장으로 '리피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이리시들은 주저없이 "노ㆍ사ㆍ정 대타협"을 꼽는다. 60,70년대 아일랜드는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았다. 20년동안 연평균 58만5천1백2일(개별 사업장의 파업시간을 모두 더한 것)을 파업으로 날려보냈다. 자성의 목소리는 노조에서부터 나왔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노조 지도자 짐 라킨은 "경제는 구조적으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해 고실업과 고인플레이션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노조는 임금 투쟁에만 몰두한다"고 개탄했다. 센 레마즈 총리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유럽 속의 아일랜드가 돼야 한다며 제조업체의 의결권 51%를 국민이 소유토록 규정한 '제조업 통제법'을 과감히 철폐하는 등 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1970년 노ㆍ사ㆍ정 3자로 구성된 국가산업경제위원회(NIEC)는 생산성 향상을 전제로 임금 인상을 보장하는 '국가임금협약'을 이뤄냈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일랜드경제인연합회(IBEC) 데이비드 그로건 수석연구원은 "경제의 기본 체질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노동자들의 임금만 올려줘 기업가들을 압박하는 결과만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임금협약이 수포로 돌아간 뒤 아일랜드 경제는 또 한번 좌초했으며 87년 극에 달했다. 실업률이 17%에 육박했다. 제조업의 고용률은 80년대 초반에 비해 25%나 떨어졌다. 런던 타임스는 "국제 자본가들은 이제 아일랜드에서 셔터를 내렸다"며 아일랜드 경제의 종언을 고하기도 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급기야 총리실 산하의 국가경제사회위원회(NECS)가 아일랜드의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담은 전략보고서 '국가 재건 프로그램'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임금인상을 3년간 2.5%대로 묶고 법인세 감면폭을 넓힌다는게 골자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으나 노조는 "나라가 사는게 우선"이라며 버티 아헌 노동부 장관(현 총리)을 만나 NESC의 정책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야당이었던 아일랜드 통일당(Fine Gael)의 앨런 듀크스 총재는 더블린 시내의 탈라지역에서 "정부가 경제 살리기에 나서면 전폭적으로 협조하겠다"며 집권당의 대폭적인 재정삭감안에 대해 초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이것이 '탈라 전략'이다. 70년대 임금 합의의 실패로 인해 주저하던 기업들도 정부의 확고한 경제 개혁 의지에 신뢰를 표하며 한 배를 탔다. 결국 87년 10월, 노ㆍ사ㆍ정은 NESC가 제안한 국가 재건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사회연대협약(Social Partnership)'에 합의했다. 노조는 노사분규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했고 정부는 실질 임금이 줄지 않도록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정부는 인구 3백60만명의 소국인 아일랜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과 신기술을 겸비한 외국기업을 유치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 외국기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과감히 허물었다. 법인세를 유럽 최저인 10%로 낮추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외국기업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를 도입했다. 87년을 기점으로 아일랜드 경제는 급속히 안정을 찾아갔다. 1995∼2000년까지 평균 경제성장률은 9.9%로 EU평균 경제 성장률의 3배를 넘었다. 국가채무도 50%로 뚝 떨어졌다. 17%를 넘나들던 실업률은 2001년에는 3.9%로 낮아졌다. 87년 1만달러에도 못 미치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불과 8년 만에 2만달러를 넘어섰다. 2001년에는 3만1천달러를 넘으면서 오랜 식민지배를 받아왔던 영국(2만4천달러)마저 누르고 서유럽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대열에 들어갔다. 다니엘 맥코이 경제사회연구소(ESRI) 선임위원은 "20년 전만 해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사회연대협약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기틀이 됐다"고 말했다. 더블린=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