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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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力道山)은 프로레슬링계에선 아직도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전광석화 같은 기술과 타고난 강골의 힘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어 1950∼60년대 초반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했다.
더욱이 그는 인기절정의 시기인 39세의 나이에 죽음을 당해 그 존재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고 있기도 하다.
일본 선수로 명성을 떨친 역도산은 24년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었다.
본명은 김신호.원래 씨름을 했던 그는 일본인 스모코치의 눈에 띄어 15세 때 일본으로 스카우트돼 모모타(百田)로 개성하고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인이어서 천하장사격인 요코즈나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의 실력은 정상에 오르고도 남는다는 평판을 받았다.
역도산이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것은 51년으로 당시 세계적 프로레슬링 선수였던 B 브란스의 일본 원정경기를 보고 나서였다.
그 후 역도산은 세계 헤비급선수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일왕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패전 후 미국 콤플렉스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은 역도산이 링 위에서 미국 선수들을 때려 눕히는 광경을 보면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다.
그는 사업적인 수완도 뛰어나 프로레슬링을 흥행사업으로 발전시켜 엄청난 돈을 모으기도 했다.
올해는 역도산이 서거한지 40주년인데,그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가 최근 회고록 '남편 역도산의 통곡'을 펴내면서 많은 비사가 소개되고 있다.
스모를 그만둔 것은 차별을 받아서였고,도쿄의 한 술집에서 폭력배의 칼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을 때 마취약을 많이 써 숨진 것 같다는 의료사고의 가능성도 제기했다.
한일회담 당시에는 우리 정부 초청으로 방한해 모종의 역할을 했으며,김일성 주석 50회 생일 때(62년)는 고급승용차를 선물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다나카 부인은 휴전선에 역도산 동상을 세우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던 남편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한다니 한번쯤 고려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