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이렇게 규정한다. '한때 제국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나라.' 초등학교교사나 대학교수나 노동자나 기업인이나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다. 영국인들은 이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코드를 맞추고 경제적으로는 나라 전체를 경제특구화하는 열린 통상국가를 지향한다. 싫든 좋든 현재 영국의 역량에 비추어 이것이 가장 합당한 '국리민복의 길'이라는 데 합의가 섰기 때문에 보수당이 집권하든 노동당이 들어서든 이 노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웃 프랑스나 독일이 영국을 일컬어 '외무부가 없는 나라니,영국 총리는 미국 대통령의 애완견이니'하고 비아냥거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늘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함으로써 실리를 챙겨왔다. 영국이 유럽에서 가장 경제적 활력이 넘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 데는 이처럼 국가적 좌표와 이정표를 확고하게 세우고 정권교체에 상관없이 목표를 향해 매진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통일 이후 유럽식 자본주의의 수정여부를 놓고 갈등하느라 국가 에너지를 소진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북해를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 보고 있는 네덜란드인들은 영어를 영국인들 못지않게 잘한다. 독어와 불어도 동시에 구사하는 이들이 많다. 유럽의 여름 휴양지를 가보면 인구에 비해 네덜란드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어떻게 외국어를 그렇게 잘 하게 됐느냐"고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말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가 유럽 최강의 물류허브 국가로 자리잡은 것은 이같은 국민적인 인식이 산업적인 성과물로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몇몇 일본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일본은 비록 2차대전 패전국이지만 이제는 세계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전쟁 세대도 물러났는데 지금도 미국이 하자는대로 무조건 따라 하느냐.이를테면 이라크 전쟁 전비와 대북경수로 비용까지 대면서 중동과 북한문제에 대한 발언권은 미국에 위탁하느냐." 이에 대해 교수든 상사원이든 언론인이든 대학생이든 비슷한 답변이 돌아온다. "좌파 지식인들의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로선 미국 편에 서는 게 현명하다는 시각이 대세다." 영국 네덜란드 일본 세 나라의 공통점은 세계화 시대 자신들의 처지(좌표)와 나아갈 방향(이정표), 내부역량(추진능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확실하게 이룩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군사정권 붕괴 이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는 지난 10여년 동안 국가의 좌표나 이정표를 정립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일문제와 대미외교 등을 놓고 국론 분열이 심각하고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대외경제정책은 전형적인 영미식인 데 반해 노동 등 국내분야는 유럽식을 지향하는 난센스가 빚어지고 있는 근본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부는 영국의 외자유치 노하우나 네덜란드의 물류허브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는 착각이다. 1만달러 소득을 달성할 때까지는 '선진국 성과물 베끼기'로 가능했었지만 2만달러로 가기 위해선 나라의 좌표와 이정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분명하게 세우고 국가역량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