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 분쟁중 프록터앤갬블 오렌지카운티 등 국제적 관심을 끌었던 거액 소송들은 모두 당사자간 협상을 통해 화해로 끝났다. 1998년 터진 한국 금융회사와 JP모건간 파생상품 분쟁도 99년 SK증권 등 대부분 국내 금융회사들이 JP모건과 화해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대한생명은 타협을 거부했다. 결과는 대생의 승리. 한국계 금융회사가 미국 법원에서, 미국 간판 금융그룹과 3년 넘게 싸워서 얻어낸 성과였다. ◆ 어떤 거래였나 =97년 초 JP모건과 국내 금융회사들은 토털 리턴 스와프(TRS)라는 이름의 파생금융상품 거래를 했다. 과거 20년간 세계 어느 통화보다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태국 바트화 가치가 크게 변동하지만 않는다면 외화를 거의 무이자로 빌려쓸 수 있는 구조였다. SK증권 대한투신 신세기투신 한남투신 LG금속 등이 앞다퉈 거래에 뛰어들었다. 대한생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97년 1월. 대생은 JP모건과의 거래를 위해 인도네시아 라부안에 '모닝글로리'라는 역외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JP모건으로부터 2천5백만달러를 1년간 차입했다. 차입방식은 만기 상환금액이 태국 바트화 환율에 따라 달라지도록 설계된 TRS였다. 보증기관인 외환은행은 백투백(back-to-back) 방식으로 보증을 섰다. 백투백 방식은 A(대한생명)와 B(JP모건)가 계약을 체결할 때 보증기관 C(외환은행)가 보증인이 아닌 계약당사자로 편입되는 구조다. A와 B, B와 C가 각각 동일한 내용의 계약을 맺어 내용적으로는 A와 C간 거래이지만 형식적으로는 A-B, B-C가 별개의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만든다. 이 경우 C는 A가 디폴트에 빠져도 B만 안전하다면 투자금을 문제없이 회수할 수 있다. 만기인 98년 1월 바트화 가치는 1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대생은 원금의 3배가 넘는 9천1백만달러를 물어내야 했다. 이후 대한생명은 99년 11월 대륙법무법인을 법정대리인으로 지정하고 소송에 나섰다. 그 즈음 1년 전부터 법정소송을 벌여온 SK증권 등 다른 피해 금융회사들은 소송을 중단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려고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 쟁점과 미국 법원의 판단 =대생은 우선 이 거래가 사기성이 짙은 것이었다며 계약 무효를 주장했다. "JP모건은 TRS 거래의 위험성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실제로는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고위험 거래인데도 JP모건은 국제 금융시장에 어두운 한국 금융회사들을 고의적으로 속였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 주장은 '계약 위반'이었다. TRS 거래에 따라 손실이 생길 경우 대생이 거래중단(조기상환)을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는데 JP모건이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손실이 더 커졌다는 얘기였다. JP모건측은 백투백 방식의 거래구조를 거론하며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형식적으로 볼 때 대생과 계약을 체결한 곳은 외환은행이므로 조기상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 책임은 외환은행에 있다는 얘기였다. 법원은 이 부분에 대해 대생의 손을 들어줬다. 헬레스틴 판사는 "중간 계약당사자(외환은행)는 실질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니었고 진정한 이해당사자는 대생과 JP모건이었다"며 "JP모건은 대생의 조기상환 요구에 협조할 의무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는 JP모건이 대생의 조기상환 요구를 들어줬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손실을 2천6백45만달러로 산정, 이를 JP모건이 대생에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 화해와 소송의 득실 =JP모건과 화해로 끝낸 국내 금융회사들은 손실액의 25∼30%를 할인받는데 그쳤다는게 금융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반면 대생은 손실액 6천6백30만달러중 일단 2천6백45만달러를 승소했고 오는 17일 추가로 보상받게 돼 있어 최소한 40%를 건졌다. 결국 소송이 화해보다 훨씬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다. 특히 SK증권은 JP모건과의 화해과정에서 불법적인 이면계약을 했던 사실이 최근 검찰 수사과정에서 드러나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되는 등 그룹전체가 위기에 봉착하는 불운을 당해 명암이 엇갈렸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