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53년만에 만난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에서 의자로 옮겨앉던 김신채(83)할아버지는 반세기의 그리움을 짧은 귓속말 한마디로 대신했다. 평안남도 대동군 동암면 신흥리가 고향인 김 할아버지는 27일 반백년만에 만난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그리움보다는 미안함에 눈물을 삼켰다. 특히 "사흘 뒤에 돌아오겠다"던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가슴이 저몄다. 무엇보다 동생들을 대신해 인민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포로로 붙잡혔기에 북에두고 온 아들에게는 더욱 미안했다. 밑으로 남동생 셋을 둔 김 할아버지가 동생들이 군대에 가기 싫다고 도망가자 1950년 7월 동생들을 대신해 인민군에 입대하게 된 것. 이후 1년 남짓 인민군포로로 생활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아들과의 약속을지키기 위해 철조망을 뚫고 나왔지만 사흘이라던 약속은 53년이 지난 뒤에야 지킬수 있게 됐다. 유독 아버지를 따랐던 둘째 아들 병우(53)씨에게 김 할아버지는 "평양을 떠날때기차역까지 따라와 가지말라고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너의 손을 떼어 낼 때는 나의 마음도 찢어졌단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7살때 헤어졌던 큰아들 병선(60)씨는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협동농장에 직장이있는데 일을 열심히 해 훈장을 많이 받았다"며 옷에 달린 훈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 할아버지는 "고생스럽지? 너의 관상만 봐도 안다"며 "살다보면 가뭄이 들고 장마가 질때도 있지만 수확할때도 있으니 열심히 살라"고 격려했다. 어린아이였던 병선씨의 머리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려있었고 고왔던 아내 김화실(83)씨의 허리도 휘어져 있었다. 세월은 흘러도 김 할아버지는 아내의 곱던 얼굴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 할아버지는 "몰라보겠군"하며 인사를 대신했고 아내 화실씨 역시 "반갑수다"라며 짤막하게 어색해하며 대답했지만 부부는 맞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김 할아버지는 준비해간 사진기로 기념촬영을 하며 "영영 볼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다"면서 "여우도 죽을 때 자기 고향쪽으로 머리를 돌리는데 나도 항상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인민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년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김세곤(77)할아버지는 "어제 잠은 잘 잤냐"며 무엇보다 동생 해곤(66·여)씨와 정곤(63)씨의 건강을 걱정했다. 평안북도 용편군에서 농사를 짓다가 인민군에 입대해 50년 9월 포로가 됐던 김할아버지는 아들 성일(56)씨에게 "아이는 몇이냐"며 후손부터 챙겼다. 성일(56)씨는 "워낙 어린 나이에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아버지를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면서 "핏줄은 속일수 없다"며 눈물을 떨궜다. 한편 27일 상봉행사에는 이들 외에도 우영걸(75) 할아버지 등 거제도 수용소에서 포로로 있었던 세 명이 이산의 한(限)을 달랬다. (금강산=연합뉴스)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