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2억달러에 달하는 대(對)러시아 경제협력 차관 미회수잔액을 군수물자 등 현물로 돌려받기로 러시아측과 비공개 합의했으나, 정부 내 이견이 불거져 오는 18일 재개되는 차관 회수협상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국방부가 미국의 압력을 의식, 러시아 무기를 대거 도입하는데 반대하고 있어서다. 정부는 러시아측에 현금 상환이 어렵다면 무기 대신 어획쿼터와 원자재 등 다른 현물 상환비중을 늘려달라는 입장이지만, 러시아쪽 생각은 다르다. 어획쿼터 등은 어차피 현금을 받고 각국에 '수출'하고 있어 사실상 현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판매가 여의치 않아 재고가 잔뜩 쌓여 있는 무기를 위주로 상환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러시아와의 수교 직후인 1991년 은행들을 통해 14억7천만달러를 차관으로 빌려줬으나 이중 4억6천만달러만 무기 등 현물로 회수, 나머지 원금에 12년간 누적된 이자가 불어나 미회수 원리금이 22억4천만달러로까지 늘어났다. ◆ '불곰사업'에 발목잡힌 협상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15일 "지난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ㆍ러 경제과학기술 공동위원회에서 전윤철 당시 경제부총리가 러시아측과 '경협차관을 양국 합의하에 우선 방산물자 등 현물로 상환받되 합의가 안되면 현금 상환 방안을 다시 논의한다'는 합의 의사록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그동안의 협상에서 '현금 아니면 어획쿼터 등 현금성 현물'을 요구해 온 한국 정부가 비밀스럽게 사실상의 '무기 상환'에 합의해준 것은 한국의 방위체계와 관련된 '정책 혼선' 탓이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2001년 러시아제 무기 5억3천만달러어치를 도입하되, 대금의 절반을 경협차관에서 상계한다는 내용의 '불곰사업'을 추진키로 하고 2002년 예산에 도입예산 5백억원을 우선 배정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불곰사업만 따로 논의할 수 없고 전체 차관협상을 일괄 타결지어야 한다고 버텼다. 정부는 예산 집행이 다급해졌고 결국 11월 말에 '양국이 합의하면 우선 방산물자 등의 현물로 상환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에 사인해줬다. 충분한 검토 없이 불곰사업을 추진했다가 러시아에 덜미를 잡힌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합의에 대해 미국측의 눈총이 따가워졌고, 국방부는 러시아제 무기 도입 확대에 대한 부담이 커졌다. 재경부 관계자는 "합의 내용대로라면 불곰사업분 외에 2조원어치의 러시아제 무기를 더 들여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국방부가 그만큼의 다른 사업(예컨대 미국 무기수입 등)을 못하게 된다"며 "이번 협상에서 현물상환 합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회수실적 통계도 허술 협상이 장기 표류하면서 그동안 러시아로부터 얼마를 상환받았고, 미회수 금액은 얼마인지에 대한 자료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보도자료에서 돌려받은 액수가 △무기 2억1천만달러 △민수용 헬기 7천만달러 △원자재(알루미늄ㆍ우라늄) 9천만달러 등 총 3억7천만달러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2일 자료에선 갑자기 상환액수가 4억6천만달러로 늘어났다. 재경부 관계자는 "지난 95년 이전에 갚은 이자(4천만달러)와 원자재(알루미늄ㆍ5천만달러)가 통계에서 빠졌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정부는 지난 95년에 한 차례 4억6천만달러를 깎아줬으며 지난해 말까지의 협상에서 러시아에 원리금의 약 30%(6억7천만달러ㆍ약 8천억원)를 탕감해 주는 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수진 기자 park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