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월드컵과 민주주의..박성주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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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park@kgsm.kaist.ac.kr
내가 잘 아는 한 대학은 몇 해전 지방에 새 캠퍼스를 마련했다.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 넓은 벌판에 꿈 같은 아름다운 캠퍼스를 완성하기 위해 유명한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그런데 민주주의 신봉자였던 대학 당국은 건물별로 해당 학과 교수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도록 했고 각 학과의 교수들은 본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건축가의 설계를 뜯어 고쳤다.
결과는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없고 산만한 건물들이 들어서서 영원히 남을 기념비적인 캠퍼스를 조성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호주 시드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그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다.
항구를 떠나는 범선 형상의 오페라 하우스는 당시 공모된 혁명적 설계에 대해 논란도 많았다.
그러나 시 당국은 많은 반대의견,기금 모금의 어려움,시공상의 난점에도 불구하고 당선자 우트존의 설계대로 2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결국 세계적인 공연 건축물을 완성했다.
내가 학교에서 싫어하는 일 중 하나는 직원들이 이런 저런 설계 안을 들고 와서 나에게 물을 때이다.
강의실은 어떤 모양이 좋으십니까,건물 외벽은 어떤 색이 좋겠습니까 등의 질문을 할 때마다 원래의 설계 전문가를 찾아 뵙고 결정해 오라고만 얘기한다.
만약 자동차나 가전제품의 새 모델 디자인을 사장이 혼자 결정하거나 또는 민주적으로 임원회의에서 투표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이런 회사가 글로벌 마켓에서 계속 생존하거나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참여를 통한 의사 결정이 최선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민주적인 절차와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가장 좋은 대안이다.
이때의 기본 가정은 한 사람의 의견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최소한 같거나 더 좋다는 데 있다.
그러나 건물의 설계와 같이 전문적 소양이 필요한 일의 경우엔 한 명의 전문가가 여러 명의 일반 대중보다 훨씬 잘 할 수 있다.
이때의 민주적 절차는 가장 신뢰하는 전문가를 뽑는 데에 그쳐야 하고 실제 일의 수행은 뽑힌 전문가가 하도록 믿고 맡겨야 한다.
월드컵 1주년이다.
국민적 감동의 월드컵은 우리에게 성공에 대한 많은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의 비결은 히딩크라는 세계적인 전문가를 초빙해 모든 걸 믿고 맡겼던 데에 있다.
만약 온 국민이 민주적인 투표로 작전을 지시했어도 우리의 월드컵 축구팀이 4강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