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가 한미정상회담을 할 때의 일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회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서 다소의 의구심(some skepticism)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회담에서 북한 김정일에 대한 인식차를 좁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순간 옆자리에 앉은 김 전 대통령의 얼굴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굳어졌다. 이런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외신을 통해서 전세계에 알려졌고,국내 신문들도 1면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한국 기자가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햇볕정책을 찬성하는가"라고 묻자 부시는 "그렇다"고 답했으나 대부분 언론은 미국의 햇볕정책 지지보다는 '의구심'에 관심을 보였다. 놀라운 것은 백악관측이 그날 회견이 끝난뒤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양국 정상의 답변 내용을 포함해 회견장의 '숨소리'까지 담긴 자료를 내외신 기자들에게 배포한 점이다. 내용중에는 부시 대통령이 곤혹스런 질문을 받고 뜸들이다가 "당신은 내가 대통령 후보일때부터 취재하지 않았느냐.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이 잘 알 것"이라며 넘어가는 장면도 말줄임표(……)와 함께 정리되어 나왔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은 즉시,그것도 정확하게 공개된다. 발언이 잘못됐더라도 해명하거나 변명할 여지가 없다. 새삼스럽게 2년전의 '실패한 외교'사례를 들추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상회담 과정의 단어 하나,어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 당시 부시 대통령의 '의구심'발언의 파장은 컸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탄력을 받던 남북관계는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동맹국인 미국의 지지선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은 야당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한국시간으로 15일 새벽 워싱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대통령간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번 노 대통령의 방미의 목적은 두나라 관계의 복원과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다. 대부분의 국민은 한반도의 안보를 담보할수 있는 약속을 받아내고,경제적 실리를 챙길 것을 주문하고 있다. 반대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다. 지금은 2년전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훨씬 나쁘다는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식이다. 만일 노 대통령이나 부시대통령이 한두마디의 '솔직한 표현'을 해 논쟁에 휘말린다면 우리의 안보환경은 흔들리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을 떠나갈것이다. 정상회담이 한미갈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때도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1946년생 개띠 동갑이다. 동갑내기라고 해서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중구난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외교란 '조국을 위해서 거짓말하는 애국적 행위'라고 하지 않았던가. 솔직한 대화는 금물이다. 국익에 도움되는 말만 골라해야 한다. 다른 얘기를 할 시간이 없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국정연설때 KBS사장 선임건에 대해서 얘기하겠다면서 '사족'을 달았다가 주객이 전도된 적이 있었다. 국내에서의 '예상밖 발언'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라도 한다. 그러나 외교에서의 '충격발언'은 그 여파를 감당키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의 증시가 출렁거리고 한반도,나아가 아시아지역 국가들의 안보환경이 크게 바뀔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에 논의의 촛점을 집중하는 것이 회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 같다. 여러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너무 솔직한' 대화가 오갈 수 있고,그렇게 되면 회담의 효과 또한 반감될 가능성이 높기때문이다. 취임 3개월은 맞은 노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도,국익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