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다] 크라운 베이커리 윤영달 사장 (5) 화의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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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 매출은 보통 크리스마스 이틀전과 하루전에 최고에 달한다.
98년 12월 크리스마스 특판기간중의 일이다.
매장 점검을 나선 윤 사장은 서울 신사점에서 진열된 케이크 하나가 약간 이상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매일 케이크 맛을 보는 그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
"이미 전국으로 퍼져나간 후였어요.무조건 다 수거해 폐기하라고 했습니다."
일반 고객이 느끼기엔 미묘한 차이로 생크림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일련번호와 생산자가 표시돼 추적할 수 있었지만 윤 사장이 차이를 느끼지 못했더라면 화의졸업은 커녕 '큰 일'이 날 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회사 분위기는 나아지고 영업도 호전돼 갔다.
가맹점은 99년 7월 5백12개까지 줄었다가 2001년 11월에는 화의 이전보다 많은 6백개를 넘어섰다.
매출 역시 96년 9백60억원에서 2000년 9백70억원,2001년 1천1백억원으로 불어갔다.
2001년에는 능률협회로부터 '대한민국 마케팅 대상'을 받는 경사까지 겹쳤다.
옛 명성을 다시 찾아 나가자 '프리미엄'도 들어왔다.
화의결정 4개월이 지났을 때 경쟁사로 가버렸던 장충동점이 2002년 6월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어떤 '예감'같은 게 오더군요."
윤 사장은 남은 부채를 확인했다.
56억여원.
금리를 조금 높게 주더라도 일반채권으로 전환시키기만 하면 화의종결이 가능해 보였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요동쳤다.
2002년 11월 12일.
화의 종결까지는 2년 반이나 남은 시점이다.
윤 사장은 서울지법 파산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한 달전 제출한 '보고의무면제신청(화의종결신청)'과 관련해 들어오라는 통보였다.
김옥중 총괄상무,김선태 재경부장과 함께 법원에 들어간 윤 사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파산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몇 가지 확인을 해준 후 밖으로 나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김 상무에게 대답대신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카메라를 꺼내 보였다.
"기념으로 남겨 둡시다."
다음 날 법원으로부터 '보고의무면제허가' 통지서가 정식으로 날아왔다.
화의가 종결된 것이다.
크라운 베이커리 임직원들은 이 날을 제2의 창업일로 기억한다.
98년 1월15일 화의신청을 한지 4년10개월 만에 '악몽'에서 벗어난 것이다.
화의에 들어간 식품업체중 최단기 졸업이다.
크라운베이커리는 이 기간중 화의채권 3백50억원과 담보채권 2백30억원을 모두 해결했다.
물론 외부에 공표하지 못하는 갈등과 시련도 있다.
그러나 외부차입이 없는 순수한 자구노력으로 이뤄낸 개가였다는 점에서 임직원들은 자부심을 가진다.
그 날 밤 회사에서는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직원들과 등산갔을 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윤 사장은 '소설주'를 만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소설주는 윤 사장이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산소주와 설중매를 절반씩 섞어 만든 '크라운베이커리 폭탄주'다.
"모든 것은 어려움을 참고 희생해준 직원들의 몫입니다.이제 여러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위해 고민하겠습니다."
축하 샴페인과 '소설주'가 그날 밤 끝도없이 돌았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