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을 캔버스 삼아 10년 이상 작업해 온 김명희씨(54).그에겐 오지마을인 강원도 춘성군의 한 폐교가 작업실이다. 1990년 소양강댐 건설로 학교는 없어졌지만 김씨는 이곳에서 공부했던 아이들이 칠판에 남긴 한글 문장과 수학 공식의 낙서 자국을 살려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5월1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8년만에 개인전을 갖는 김씨의 칠판작업은 현실과 상상의 이중성,현재와 과거의 통시성을 한 화면에 아우른다. '유전의 역동성'으로 붙인 제목도 작가의 인생유전과 깊은 맥락이 닿아 있다. "아버님이 외교관이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외국에서 다녔는데 한 곳에서 2년 이상 머물지 못할 만큼 부평초처럼 흘러다녔죠." 김씨는 17년간의 뉴욕생활을 청산하고 90년대 초 남편인 화가 김차섭씨와 함께 이곳 오지마을의 폐교를 사들여 예술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떠난 이 폐교의 칠판에 환영으로 남아 있는 어린이들에게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한글 문장 등이 반쯤 지워진 칠판에 오일 파스텔로 인물과 사물을 극사실 기법으로 복원해 내기 시작했다. 출품작인 '내가 결석한 소풍날'과 '김치 담그는 날'은 시간의 흔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생활 속 느낌을 심도 있게 표현한 작품들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LCD 화면은 칠판 한구석에 설치돼 공간과 시간의 상징성을 대비시킨다. 5월13일까지.(02)734-6111 이성구 미술전문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