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라크 공격'] (美-이라크 악연) 석유社 민영화 놓고 첫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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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라크간 갈등의 역사를 알려면 먼저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지난 79년 출발한 후세인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아랍내 경쟁국은 물론 미국 등 서방국가와 투쟁을 벌여왔다.
아라비아어로 "충돌하는 자"를 뜻하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출범은 중동지역 패권과 석유 지배권을 놓고 이해 당사자국과의 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지난 91년 발발했던 걸프전은 물론 걸프전의 단초를 제공했던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그에 앞서 벌어진 이란·이라크간 8년전쟁의 배경에는 강력한 '아랍제국'을 꿈꾸는 후세인의 야망이 깔려있다.
37년생인 후세인 대통령은 '아랍 통일'을 정강정책으로 내건 바스당에 20세에 입당했다.
그는 바스당이 정권을 잡은 68년 31세의 나이로 권력 2인자인 혁명지도평의회 부의장에 오른 후 공안 책임자로 정적을 제거하면서 권부실세로 입지를 굳혔다.
후세인은 79년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다음해 이란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이라크는 동지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란의 과격파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를 싫어한 미국은 최첨단무기와 각종 군사정보를 이라크에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과 이라크는 89년부터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라크 국영석유회사의 민영화를 요구한데 대해 후세인이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석유를 둘러싼 양국간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후 이라크내에서 미국과 영국의 영향력은 약해지고,그 빈자리를 프랑스 러시아들이 대신하게 된다.
이라크는 90년 8월2일 쿠웨이트에 진주했다.
다음해인 91년 1월17일 미국 영국 등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사막의 폭풍작전(Desert Storm Operation)'을 감행했다.
다국적군은 최첨단 무기와 막강한 화력으로 불과 43일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무기 은폐와 무기사찰 지연 등 유엔안보리 결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93,96,98년에도 이라크를 공중 폭격했다.
이번 전쟁의 직접적 계기는 미국 뉴욕 무역센터빌딩에 대한 테러공격이 감행된 2001년 '9·11사태'에서 출발한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을 통해 이라크 북한 이란을 '3개 악의 축'으로 지정,양국간 긴장관계를 고조시켰다.
미국은 무역센터를 폭파한 알 카에다 등 국제 테러조직의 배후로 이라크를 지목,완전한 무장해제가 아니면 전쟁을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지난해 11월 이라크 공격을 위한 1차 결의안을 채택한데 이어 올 2월25일에는 3월17일까지 전면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2차 결의안을 제출,이라크를 압박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반전 여론에 따라 2차 결의안 채택이 어려워지자 3월16일 전쟁에 적극적인 영국 스페인 총리 등과 3국 정상회담을 갖고 이라크 공격으로 방향을 확정,오늘에 이른 것이다.
최인한 기자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