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서성환 회장님! 어인 일로 서둘러 가셨습니까? 회장님께서 가시던 날, 대지를 얼어붙게 하던 추위마저도 후덕하셨던 자애를 그리워하듯 맹위를 수그러뜨렸습니다. 지난번 뵈올 때 대한화장품공업협회장을 사양하는 저에게 "좀 더 수고해서 업계 발전을 도와야 한다"시며 "외국 회사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 화장품 업체들이 밀리지 않으려면 선두 그룹의 회사들이 잘 해야 한다"고 격려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회장님께서는 1945년 태평양을 창업하시어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이래 60년 외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용생활용품기업으로 태평양을 성장시키시며 아름다움과 건강이 함께하는 윤택한 삶의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1966년부터 18년간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으로 재임하시면서 업계 발전에 앞장 서셨습니다. 특히 외국산 화장품의 수입 개방을 연장시키는 한편 화장품의 질적 향상을 위해 큰 연구소를 만드시고 화장품 박물관과 차(茶)박물관을 설립, 전통 문화 보존에도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태평양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량기업이자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으로 키우신 탁월한 기업인이셨으며, 아무도 돌보지 않던 녹차를 대량 생산해 국산차를 대중화함으로써 국민의 건강 증진에도 기여하신 참 경영인이셨습니다. 서 회장님께서는 오늘날 화장품 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셨으며, 고객을 향한 신뢰와 사회로부터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의 의무를 몸소 실천하신 원로로서 화장품 업계에서 무한한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1993년에는 '소비자가 원치 않는 제품은 무한 책임을 지고 바꿔준다'는 내용의 고객 중심의 무한 책임경영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10년이 지난 지금 수입 화장품과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국산 화장품 업계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너무도 빈곤했던 1960년대 후반 서 회장님은 여성을 활용한 방문판매 유통을 화장품시장에 정착시킴으로써 많은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경제적 여유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공헌을 하셨습니다. 유독히 장원(粧源)이라는 호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던 서성환 회장님! 필동의 지붕 밑방에서 회장님을 모시고 임광정 조중민 님과 협회 일을 의논하고 늦은 점심을 설렁탕으로 때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1960년 겨우 1억원에 불과하던 화장품 생산은 이제 4조원대에 육박했으며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화장품 생산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시대에 밀려오는 외제 화장품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이즈음 원로 회장님을 잃은 슬픔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비록 회장님은 가셨지만, 우리나라 여성의 아름다움과 국민의 건강을 위해 애쓰셨던 회장님의 사랑과 꿈은 태평양의 번영과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 화장품 산업의 발전사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편히 잠드소서. 2003년 1월10일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유상옥 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