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쟁력이 국가경쟁력이다] (4) '구조조정, 자율에 맡기자'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빅딜(대규모 사업맞교환)은 우리 산업정책사에서 '망령'같은 존재다.
국민의 정부 초기를 대표하는 정책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내가 했노라"며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인지 논의되고 실행된지가 채 5년도 안됐는데 정부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산업정책을 총괄한다는 산업자원부에서조차 담당 공무원들의 '기억' 외에는 공식적인 자료를 구하기 힘들다.
산자부 홈페이지에서 '전자민원' 코너를 검색해보면 빅딜이 두번 나온다.
하나는 발전설비 빅딜 이후 신분상의 문제가 생긴 전 삼성중공업 직원이 '고용보장' 합의에 대해 묻는 질의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에 재학중인 연구자의 자료 요청이다.
두번 모두 산자부의 답변은 '남의 일'이다.
"기본적으로 대기업 빅딜은 전경련이 중심이 돼 자율적으로 추진했던 사안"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빅딜 해당 업체 임직원들이 이름을 외다시피하는 당시 주무부처 장관들 중에도 빅딜을 주도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책임회피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해당 업체나 야당의 지적이 아니다.
여당 스스로 자인하는 실패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지난 대선 TV토론에서 "빅딜정책은 시장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게 아니라 정부가 개입해 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성과도 부정적"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빅딜만이 한국 구조조정의 전부인 것처럼 밀어붙이던 국민의 정부 초창기를 생각해보면 5년간의 간극이 너무 벌어져 있다.
98년 당시를 기억해 보자.
'빅딜' 논의가 일자 "구조조정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는 재계에 대해 재정경제부장관 청와대비서실장 금감위원장 같은 각료집단이 '최고위층의 뜻'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도 직접 "대기업이 빅딜 등 경제개혁에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줘야 하며 특히 전경련이 앞장서야 한다"(98년6월17일 대통령 경제단체장 오찬간담회)고 강조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인가.
시간의 낭비요 정부와 재계간 불신의 골만 깊어졌다.
석유화학업계를 예로 들면 현대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을 합치려던 정부의 의지가 두 업체 모두에 짐만 됐다.
5년이 지난 지금 현대석유화학은 LG와 롯데 컨소시엄에 매각절차를 밟고 있고 삼성종합화학은 5년을 낭비한 끝에 외자유치에 성공했다.
두 업체 모두 그냥 두었으면 회생의 길이 5년 앞당겨졌을 터이다.
빅딜의 실패는 시장상황의 변화를 알기 힘든 정부가 기업의 전략과 정책에 '직접' 개입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언제 돈을 빌려 투자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보수적인 투자계획을 세워야 하는지는 해당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쉽잖은 판단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로 세계 정상 기업이 된 것은 일본과 미국 업체들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투자 승부수가 결정타였다.
그런 결정은 해당 기업만이 할 수 있고 책임도 온전히 해당기업이 지는 것이다.
해당 업종 경기동향을 연구, 분석하고 경쟁사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런 미묘하고 어려운 일에 정부가 나서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공급과잉'이 빅딜의 논리였지만 과연 세계를 상대로 한 업종에서 공급과잉 여부를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빅딜 논의 과정에서 우리가 배운 교훈은 간단하다.
시장은 정부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은 글로벌화가 진전된 90년대말만 해도 이미 늦은 것이었다.
전략적인 산업정책은 분명 필요하다.
일본과 중국 등 인접 경쟁국들에 대해 우리 기업들이 경쟁우위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인프라 구축, 제도 정비 등이 그것이다.
나머지는 결국 시장에 맡기는게 최선이다.
기업의 흥망은 기업주의 책임이다.
감시는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하면 된다.
은행이 돈 빌려준 기업의 부실 징후를 발견하지 못해 '물리게 되면' 그 책임을 지면 된다.
실패한 기업을 퇴출시키든 다시 회생작업을 하든 그것도 채권단에 맡기면 된다.
그게 큰 피해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정부는 빅딜 논의에서 보듯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면 그뿐이다.
정부가 그리는 산업정책을 마음놓고 믿기 어려운 이유다.
기업이 잘하고 있어서 그냥 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시장은 정부가 구도를 짜 움직이기엔 너무나 거대하면서도 글로벌화됐고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의 속도도 빨라졌다.
빅딜뿐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 한 모든 정책에 이런 기본 생각을 갖고 임한다면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