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백16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1337∼1453년)은 왕위계승에서 비롯됐지만 직접적인 충돌은 양모(羊毛) 때문이었다.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사촌인 필립 6세가 왕위에 올랐는데,영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대립했다. 급기야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대한 양모(羊毛) 공급을 전면 중단했고,이로 인해 프랑스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플랑드르는 유럽 최대의 모직물공업지대로 이 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다. 카펫과 의복 등을 만드는 양모가 당시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모직 거래에 눈을 뜨고서였다고 한다. 양모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4000년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양모직물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유럽 전역에서 양모가 일반화된 것은 로마가 식민지에 양의 사육을 장려하면서부터였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실을 만드는 방적기술이 발달하면서 영국과 이탈리아가 모직산업을 주도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모직산업은 80년대까지만 해도 보잘 것 없었다. 90년에야 비로소 외국 기술지도를 받아 1백수(手)직물을 생산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출발한 모직산업이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했다는 소식이다. 제일모직은 세계 최초로 양털 1g에서 실 1백70m를 뽑아 만든 양복 옷감(란스미어 220)을 선보였다. 굵기가 머리카락의 7분의 1 정도인 1백70수 원단은 양복지 역사가 2백년이 넘는 유럽에서도 아직 개발하지 못한 것이어서 그 '상징성'이 무척 크다고 한다. '수'를 반도체의 메모리 용량으로 비유한다면 1백70수는 기가급인 셈이다. 이 회사는 신개발한 옷감을 양모 종주국인 영국 등지에 수출할 계획이라고 하는데,내로라 하는 세계 부호들이 한벌에 2천만원을 호가하는 우리 원단의 양복을 입을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