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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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철저한 고증을 통해 최대한 옛 모습을 재현하려 애쓴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복원공사에서 보듯 종탑의 돌 한 조각도 허투루 쓰지 않을 정도로 세심한 신경을 쓴다.
어느 지방의 돌이었는냐를 따져 그곳의 석재를 사용할 정도이다.
남대문으로 불리는 우리 국보 1호인 숭례문(崇禮門)의 아치부분 홍예석이 며칠전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자 그 보수를 둘러싸고 고민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다.
홍예석을 다시 붙이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무게가 2백40㎏이나 돼 연결못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경우 본체훼손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대안으로 홍예석과 색깔 모양이 똑같은 FRP(합성강화수지) 사용을 주장하고 있으나 "국보에 플라스틱을 붙여서야 되겠느냐"는 강한 반론에 부딪혀 있다.
이런 사정으로 숭례문은 당분간 상처입은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때인 1395년에 건축됐다.
한양에는 각각 4개의 대문(大門)과 소문(小門)이 세워졌는데 대문으로는 동쪽에 흥인지문,서쪽에 돈의문,남쪽에 숭례문,북쪽에 숙청문이 자리 잡았고 소문으로는 동북쪽에 혜화문,서북쪽에 창의문(자하문),동남쪽에 광희문,서남쪽에 소의문이 있었다.
이중 숭례문은 한양의 정문격인데다 그 규모가 제일 커 국보 1호로 지정됐고 한해 늦게 세워진 흥인지문은 보물 1호가 됐다.
숭례문이라고 쓴 편액의 필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남대문은 일제가 우리 문화를 격하시키려는 의도로 단순히 방향을 지칭하면서 일반화됐다.
6백년 이상 된 숭례문은 세종 성종 시절에 대대적인 개수공사가 있었고 1961∼63년에도 해체수리공사를 했다.
이번 사건은 60년대 초 공사를 할 때 사용한 무쇠연결못이 녹이 스는 바람에 접착력이 약해져 일어났다.
문화재가 그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보수공사는 결코 서둘 일이 아니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