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바꿔야 '경제'가 산다] 4부 : (6) '주총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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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 정치자금 주총승인 받아야 ]
그동안 정치자금이나 이를 매개로 한 부패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정치인들에게 집중되어 왔다.
하지만 정치자금을 기부한 측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작고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일정하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고 폭로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기업과 정치권과의 정경유착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따라서 정치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권의 '수요' 측면 못지 않게 정치적 특혜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공급' 쪽에서도 부패고리의 한 축을 형성해온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재계가 정치권의 부당한 정치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변화다.
그러나 이러한 재계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소위 세풍(稅風)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기업주나 경영진이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압력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은 정치자금 마련에 필사적이다.
따라서 재계가 정치자금과 관련해 정치권으로부터의 부당한 압력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관행을 제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다.
물론 기업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특정 정당(혹은 후보자)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일까지 부정한 것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내역이 밝혀지지 않은 채 기업주나 경영진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음성적으로 기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자금 수수의 이같은 특성으로 인해 그동안 재계 역시 정치권의 압력과 국민들의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업이 일정한 정도로 정치자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되 그것이 기업주나 경영인의 자의적 판단이나 그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혹은 정치권의 압력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막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 영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영국에서는 기업이 정치자금을 기부할 경우 반드시 주주총회에서 사전승인을 얻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 규정을 위반하면 정치기부금 혹은 관련 비용 전액과 그 이자, 그리고 그로 인해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면 발생한 손해를 포함하는 모든 금액을 경영진이 물어내야 한다.
그러나 주주총회에 구체적인 기부대상이나 기부액 등을 명시한 상세한 지불내역까지 제시하고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지출할 정치자금 혹은 정치관련 비용의 총액에 대해서만 주주들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말해 주주총회에서는 기업이 사용할 정치자금 규모에 대해 승인을 얻도록 하였고 정해진 범위 내에서 기부 대상이나 기부 금액은 경영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노조 역시 정치자금을 기부하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은 정당의 수입에서 기업이나 노조가 제공하는 정치자금 기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보수당은 재계로부터, 노동당은 노조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정치자금을 지원받고 있다.
게다가 영국의 정치자금 관련법에는 기부금의 상한액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정치자금 기부의 자격을 갖춘 경우에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액수만큼 정당에 기부할 수 있다.
기업 정치자금의 주총 사전승인제는 정치자금이 기업 경영진이나 노조 지도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제약없이 제공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정경유착이나 부패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한국경제신문 공동기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