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업의 문화적 책무..鄭玉子 <서울대 교수/규장각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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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필 무렵에 가득 담갔던 김치를/아카시아 필 무렵에 다 먹어버렸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있던 시구인데 가끔 생각난다.
처음엔 가을 날 들국화가 피거나,무르익은 봄날 아카시아 꽃이 필 때만 생각나서 계절을 노래한 시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시가 은연중에 우리의 저장문화를 은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이고 저장문화가 발달했다.
그래서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곡식을 저장했을 뿐만 아니라 밥에 어울리는 반찬으로 여러 가지 김치를 담가 땅에 묻어 놓고 겨울 내내 그리고 봄까지 먹었기에 이런 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저장문화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싶다.
예컨대 기업들도 그동안 팽창과 축적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과정에서 정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경유착의 관계를 맺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의 계절을 맞아 경제인들이 정치권에 대해 과거와는 다르게 처신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눈치작전을 접고,분명한 어조로 자기소신을 밝히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더 이상 명분 없는 정치자금을 낼 수 없다'든가,'시장경제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언급도 보인다.
아울러 경제인의 도덕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경제계의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전통시대의 직업적 위계가 사·농·공·상이었다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사회의 지도이념은 유학이었고,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였기에 유학을 공부하여 사회를 이끌었던 지식인인 사(士),즉 선비는 선비정신으로 무장하고 투철한 자기인식과 실천을 통해 사회에 기여했다.
농민은 생산 담당자로서 '농자(農者)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라는 것이 기본인식이었다.
그 시대에는 지방 곳곳 만석꾼 천석꾼 집에 과객들의 무료숙식을 위한 행랑이 개방되어 사회봉사를 했다.
김삿갓이 죽장에 삿갓 쓰고 삼천리 강산을 방랑할 수 있었던 것도 열두대문 문간방에서 무료숙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토가 사랑방문화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이들 대가는 거의 사대부 양반집이었고,그 재원은 농사에 있었다.
그 시대다운 사회 환원 장치였던 셈이다.
이제 상공업이 기간산업이 된 현대사회에서 상공인이 대접받는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다.
현재는 직업의 위계질서에서 상공인이 차지하는 위상이 가장 높다.
그래서 상공인단체나 경제인연합회는 때때로 정치집단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고,상공인 출신 정치인도 많다.
이렇게 상공인들이 사회의 주축이 됐다면 그 사회적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고,기업이 그 축적된 자본을 사회에 환원하고 기여하는데 따라 우리 사회는 건강성을 회복할 것이다.
현대의 경제인은 전통시대 사대부에 걸맞은 위상을 갖고 있다.
경제인은 전통시대 선비에 못지 않은 사회적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경제인에 대한 기대치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통시대 사대부가 지식으로 사회에 기여했다면,현대의 상공인은 경제력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문화재로 눈을 돌려보자.일제시대에 훼철(毁撤)된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왕궁이나 행궁 왕릉 등 왕실관계 문화재는 물론 서원이나 향교 등도 헐리거나 경역이 축소돼 있다.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호구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유지를 사들여야 한다.
전통시대 그림 물감인 석채 등 자연물감이 거의 사라져 일본이나 독일에서 사다 쓰고 있다.
전통그림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원료를 재배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문화재를 수리하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러한 일을 국가기관에만 맡겨놓아서는 인력과 예산규모로 보아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기업이 이런 전통문화 복원을 위한 기금조성에 발벗고 나선다면 기업문화의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 국가의 문화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멀지 않아 기업문화는 찬란한 열매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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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