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다. 황사만큼이나 정치가 우리들 하루하루의 삶을 뒤덮고 있다. 지자체 선거가 끝나면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이어지고 연말에는 대선이 기다리고 있다. 정치일정을 바라보자면 숨이 막힌다. 이런 때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말을 놓고, 그 말을 '술 먹고 했을 수도…'하는 미묘한 표현으로 본질을 비켜가는 것을 본다. 술과 정치 모두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는 "정치란 열정과 판단력이라는 두 개의 연장으로 두껍고 견고한 목재에 힘을 다해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했다. 열정과 판단력이 정치가의 덕목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치에 대해 내가 더 좋아하는 말로는 '타협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작고한 명배우 앤소니 퀸은 한때 정치가가 되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버리고 배우로써 일관된 생애를 살았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렸다. 정치에 대하여 그는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평생 창조적인 작업에 매달려온 내가 어떻게 타협의 예술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치에 대한 꿈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이 정치다. 거짓말이나 하고,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기고, 이리 붙고 저리 엉키며 이합집산이나 해대고, 때에 따라 말 바꾸기나 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열정과 판단력 그리고 타협의 예술이 정치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한 시대의 시련으로부터 민족을 이끌어간 정치지도자를 우리는 무수히 알고 있다. 언젠가는 언론인을 앞에 놓고 육두문자를 해대고 나서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하고 비켜가던 여성의원도 있었다. 우리 사회는 왜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면 용서가 되는 것인지, 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하나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이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소년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황홀해지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표 깃발 의자…우리가 마시는 차 같은 것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하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듯 생각하곤 했었다. 그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황홀한 것 가운데 술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이 세상에서 누가 처음 이토록 절묘한 술이라는 것을 만들었을까'술을 마시며 생각하곤 한다. 이건 '신의 눈물'이 아닐까. 어쩌면 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이다. 술에는 지옥과 천국이 공존한다. 그것은 때때로 희망 없는 정념(情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때때로 술은, 다 용서하고 그 용서 받음마저 용서하는 무책임한 덫과도 같다. 그리고 술은 시간이 멈추어 버린 시간이다. 지난 밤의 술자리는 '바람난 년이 떠나간 자리'같다. 그러한 그 술을 놓고, 분명히 책임져야 할 말을 했으면서도 '술자리에서 한 말을 가지고…'라는 췌언으로 비켜가려 하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은사이신 황순원 선생은 예술과 술을 놓고 "예술은 나만 사랑하라고 하고, 술은 아무다 다 사랑하라고 한다"는 절묘한 비교를 하셨었다. 술의 포용성을 두고 한 말이지만, 황순원 선생이 생전에 우리들 제자에게 보여주신 술과의 친화감은 거의 경이에 가까왔다. 내게 술을 가르치신 장모님은 "술 먹고 한 말은 모래밭에 가 칼을 물고 죽더라도 했다고 해야 한다"고 섬뜩한 말로 가르치셨다. 속에 있던 말을 술기운에 내뱉은 거니까 결코 그것을 술기운 때문이라는 말로 비겁하게 부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뭐래도 술은 아름답다. 정치도 아름다운 것이다. 이견을 조정해 내고, 각기 다른 의사를 가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통합하고, 합의에 의한 과제를 정해서 다수의 힘을 한곳에 결집시켜 나가는 것은 정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이념도 세계관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좁은 문' '사전꾼들' 같은 명작을 남긴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소련여행을 통해 비로소 공산주의의 허구를 깨닫고 전향한다. 누구도 그를 비겁하다고 폄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 먹고 한 말이라…'는 용렬함으로 자신은 물론 술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선거의 해를 지나며, 술도 정치도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 매김 되기를 모두에게 바라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