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이보그가 공존하는 2029년의 세상. 사이보그로부터 기억을 해킹당한 나, 의지와 생각을 갖는 뇌와 사이보그 몸체를 가진 나, 사고는 있지만 생식 능력이 없는 나는 과연 인간일까 사이보그일까.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매이션 '공각기동대'는 네트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 정체성을 탐구한 작품이다. 지난 95년 제작됐지만 여전히 '첨단' SF물로 평가된다. 광활한 통신망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사이보그 육체로 정보를 교환하는 미래 사회. 그곳에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형사'라는 해커를 사이보그 경찰인 '쿠사나기' 소령이 뒤를 좇는다.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인 인형사는 자신이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라고 주장하면서 망명을 요구한다. 쿠사나기는 인형사와의 숨바꼭질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는다. 인형사에게 기억을 해킹당한 청소원은 10년동안 독수공방 신세로 지냈지만 '존재하지 않는' 딸과 아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정보가 현실인 것이다. 잘못된 기억을 가진 그를 진정한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손을 남기고 죽는 생명의 프로그램이 없는 인형사는 스스로 '개성이나 다양성이 없는' 불완전한 생명체임을 인정한다. 이로써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한몸이 되자고 요구한다. 생명이란 융합을 통해 다양하게 진화하며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생명의 본질을 'DNA 구조'에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정보의 구조'로 대체하고 있는 현대 생물학의 성과가 그대로 담겨 있는 대목이다. SF영화 '매트릭스'는 이 작품에서 모티브를 빌려 왔다. 매트릭스는 감각과 기억이란 뇌가 해석하는 전자신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네트워크로 정보를 소통하는 세상에선 얼마든지 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했다. 12일 개봉, 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