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市場친화적 정치헌금..安世英 <서강대 국제통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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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앞두고 달아오르는 정치판에 재계가 한마디 했다.
겁(!)없이 정치자금을 호락호락하게 내지는 못 하겠다고 한 것이다.
과거 많은 비리가 정치자금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앞으로 제대로 되려면 재계는 정치자금을 내야 한다.
이왕 내침 김에 합법적이고 투명할 뿐만 아니라 시장친화적인 정치헌금을 통해 경제가 너무 정치논리에 휘둘리는 것을 견제하도록 해야겠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배운지 불과 반세기만에 놀라울 정도로 이를 잘 활용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빨리 배운 만큼 빠른 속도로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변질시키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시대 정경유착을 통한 친기업적·친재벌적 정부정책이 문제였다면,언제부터인가 이 땅에는 경제적 약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선을 그어 정책의 획을 긋고 있다.
특정계층이나 이해집단을 불쌍한 약자로 단정짓기 시작하면 정부는 시장메커니즘을 통하기보다 정서적으로 이들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여기다 이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면 선거 때 표밭을 의식한 정치가는 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정치논리에 휘말려 국가경제와 재정이 병들면 결국 이 부담을 떠맡을 자는 납세자인 국민과 기업이다.
누군가가 이같은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데,일반국민은 나라경제가 골병이 들어 높은 세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압박하기 전까지는 '남의 일'처럼 느낀다.
결국 남는 것은 기업이다.
인기영합의 정치논리로 시장경제의 발목을 상습적으로 잡는 정치인이 있다면 선거 때 '표밭'은 챙길 수 있어도 '돈 밭',즉 기업의 정치헌금에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선진민주주의의 간단한 산술(算術)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국내 경제문제는 물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에서 보듯이 우리 재계는 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한·칠레 FTA가 체결되면 포도 등을 사주는 대신 가전 자동차 등을 수출해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WTO 회원국 중 유일하게 지역무역협정을 안 맺은 통상국가라는 불명예(!)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농민단체는 포도농가 보호라는 현수막 아래 사회단체까지 동원해 협상을 교착에 빠뜨리는 쾌거를 이룬데 반해 정작 자유무역의 옹호자로서 정치적으로 몰리는 정부를 지원해줘야 할 재계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팔짱을 끼고 정부와 농민단체가 힘 겨루는 것을 지켜보다 칠레시장이 열리면 무임승차(free-riding)하겠다는 심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NAFTA 협상시 미국의 재계는 달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였다.
노조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일자리가 모두 멕시코로 도망갈 듯이 들고 나왔고,여기에 환경·농민·사회단체까지 합세했다.
더욱이 친노조·환경보호적 성향이 강한 여당인 민주당 의원마저 다수가 반대하고 나섰다.
클린턴 대통령으로선 정치적으로 도저히 승산 없는 한 판 수였다.
그러나 이같은 거센 반발을 극복하고 NAFTA를 출범시킨 뒤에는 대통령의 리더십도 있었지만 미재계 정치헌금의 위력이 컸다.
그 당시 미재계가 반NAFTA 성향의 의원에게 보낸 메시지는 명료하고 단호했다.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표밭이 그렇게 중요하면 재계의 정치헌금은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 미재계는 NAFTA를 반대하는 의원보다 지지하는 의원 쪽에 훨씬 많은 헌금을 했다.
올해 선거를 통해 재계는 투명할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의 정치적 참뜻을 아는 정치인을 격려하는 정치헌금을 통해 정치와 기업간 새로운 게임 규칙을 만들어야 하겠다.
그런데 한가지 우려되는 점은 '과연 우리 재계가 똘똘 뭉쳐 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지킬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만약 몇몇 재벌이 과거의 악습을 못 버리거나 괘씸죄에 굴복하면 지금 한창 여론의 갈채를 받는 재벌의 참신한 변신은 이야기를 안 꺼내니 만도 못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syahn@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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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