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에서 진천 방향으로 15분 가량 달리면 닿는 서운산 석남사(石南寺).산사의 아침공기가 청량하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년)에 석선사(奭善師)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높다란 계단 위의 대웅전과 그 아래 영산전,절 입구쪽 좌우의 요사채 둘,가람구성이 참 단출하다. 왼쪽 요사채의 외벽 기둥에 걸린 한글 주련이 눈길을 끈다. "우주는 한 집안/중생은 한 몸/서로 원망 말고/은혜만 갚아라" 주지 정무 스님(정무.71)은 마침 행자 세 명을 가르치던 참이다. 행자들의 표정을 보니 은사의 가르침이 얼마나 엄한 지 짐작할만하다. 지난 58년 전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정무 스님은 '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청규(淸規)를 실천해온 수행자로 알려져 있다. 재작년에 이천 영월암에서 이곳 석남사로 온 뒤에도 상좌들과 함께 1천여평의 논밭을 직접 일군다. 가람 구성이 왜 이렇게 단출한 지 궁금했다. "주지로 와 보니 절이 너무 어지러워졌어요. 제대로 된 건물은 4채 뿐이고 가건물이 9개동이나 됐어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지었던가봐요. 그래서 그중 슬레이트집 한 채만 남기고 다 부숴버렸지요. 요즘은 산골짜기 절도 국제적으로 다 열려 있어서 잘 정리하고 가꿔야 해요" 그렇다고 당장 큰 불사(佛事)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가건물이 있던 자리는 공터로 정리만 해놓은 상태다. 사찰운영에 대한 스님의 소신 때문이다. "주지란 안주도량(安住道場)호지불법(護持佛法),즉 도량을 편히 안정하고 불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해야지요. 그러니 불사를 한다고 목표를 정해놓고 시주금을 거두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냥 돈이 생기는 대로 점진적으로 해야지요. 있으면 있는대로,없으면 없는대로 해도 잘 살아갑니다" 스님의 이런 생각은 '부처님 오신날' 연등을 다는 풍경까지 바꿔 놓았다. 석남사의 연등은 크기가 똑같다. 시주금도 표시하지 않는다.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닌 데 등값을 매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무 스님은 강조한다.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형편대로 분수껏 하면 된다는 것.때문에 석남사에서는 시주금에 관계없이 똑같이 연등을 나눠준다. "돈이 많은 절에서 욕심을 더 내요. 불교가 그렇게 하면 단명해요. 부처님 가르침대로 해야지요" 정무 스님은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사람이 돼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건재하고 있는 것은 부모와 국가,이웃,스승,자연이라는 다섯가지 인연에 의한 것임을 알고 그 은혜를 갚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다섯가지가 똘똘 뭉쳐서 우리가 존재합니다. 만일 그 가운데 하나라도 없다면 지금 내가 건재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이 없다면,유구한 역사와 문화속에 형성된 국가가 없다면,내 이웃과 자연이 없다면….이것이 바로 연기법이며 이 은혜를 알고 갚는 사람이 바로 선인(善人)이요,보살입니다" 스님은 "은혜를 아는 사람의 행동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은혜를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 무엇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항상 조심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면 사치하고 과욕을 부리며 게으른 악인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정무 스님의 생활은 하나부터 열까지 근검절약의 실천이다. 차담(茶談)을 나누는 방부터 그랬다. 넓직한 방바닥을 전부 카펫으로 덮어놨길래 푹신하라고 그런 줄 알았더니 보온을 위해서란다. 난방비를 줄이기 위해 요사채 하나는 겨울에 쓰지 않고,한 곳에서만 생활한다. 그나마 심야전기로 물을 데우고 낮에는 일체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카펫으로 덮어두지 않으면 방이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이다. 영월암에선 주지 방에 딸린 화장실도 없애 버렸다. 수세식 화장실이 쓸 때에는 깨끗하지만 결국은 환경을 버린다는 생각에서다. "대중목욕탕에 가보면 물을 틀어놓고 가버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사과 하나를 깎아도 과육을 아무렇게나 버리는 일이 허다하지요. 아무리 많이 벌어도 잘 관리하지 못하면 허사입니다" 정무 스님은 다섯가지 은혜 중에서도 부모님의 은혜를 특히 강조한다. 부모님의 자녀사랑은 본능이라서 배우지 않아도 알지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알고 사랑하는 것은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수원 용주사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탑을 세웠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은혜를 안다면 주객(主客)간에,이웃간에,노사간에 싸움을 안합니다. 남의 마음을 알아서 챙겨주는 자세가 필요해요.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혼자만 잘났다고 하니 싸움이 나고 사고가 생기는 겁니다" 스님은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가운데 죽일 놈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그래도 서로 싸우는 건 욕심 때문"이라며 "남을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명(正明)의 길'이라는 생활수칙을 담은 명함 크기의 카드를 하나 내준다. 본성을 해롭게 하는 직업은 버리고 합리적인 자연식을 하며,매일 적합한 노동이나 운동을 하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다시 이천으로 나오는 길,절에서 지프차를 내줬는데 운전을 하던 행자는 이렇게 귀띔했다. "스님께선 평소에 혼자서는 승용차를 타지 않으시고,저희들에게도 세가지 이상 용무가 없으면 차를 쓰지 못하게 하십니다. 손님은 특별대우를 받은 셈입니다" 안성=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